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 (25) 애월조점(涯月操點)

김창집 2005. 2. 13. 07:36

♣ 이 글은 '열린제주시정'에 실었던 글입니다.

 


 

* 탐라순력도 중 '애월조점'

 

▲ 변한 것과 남아 있는 것

 

 애월진 소속이었던 남두연대(南頭烟臺)의 안부를 묻고자 하귀리를 벗어나 가문동 입구에서 해안도로로 들어섰다. 처음 도로를 계획했을 때 환경 단체들의 반대에 음식점이나 큰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을 허가하지 않겠다던 당국의 약속과는 달리 많은 집들이 들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갯녹음이니, 백화현상이니 하여 해안이 오염되는데, 다른 나라처럼 보전 차원에서 개발할 수는 없는지?

 

 애월읍 신엄리에 위치한 제주도 기념물 23호 남두연대는 언제 복원했는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애월진 관할 봉수대로는 고내망(高內望)이 유일한데, 동쪽으로 수산망(水山望), 서쪽으로 도내망(道內望)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고내봉 정상에 가보면 봉덕 3개가 잡초 속에 묻힌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애월진 소속의 또 다른 연대인 애월연대(涯月烟臺)도 속칭 한담경에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 남아 있는 성의 일부

 

 애월 포구는 순력도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밖으로 크고 넓게 방파제를 쌓는 한편, 바다를 매립해 횟집과 단란주점이 들어섰다. 애월항은 1995년에 연안항으로 지정되었는데, 물동량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어 앞으로 육지부와의 교역 중심지로써 그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고 한다. 축항 안쪽으로 제주 우체국과 애월초등학교를 잇는 길까지는 매립하지 않고 남겨놓아 그런 대로 순력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 하물과 도댓불(등대)의 복원

 

 애월(涯月)은 물이 어려운 제주도내의 마을 중 축복 받은 땅이다. 마을 중심에 있는 하물이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와 경향신문사가 공동으로 조사 선정한 '한국 명수 100곳'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될 정도다. 도내에서는 제주시 도두동의 오래물과 서귀포시 색달동의 천제연, 상효동의 돈네코가 이에 포함된다. 그밖에도 장공물, 큰물, 구마물, 서하물, 말물, 시궁물, 손두벌물, 고수물, 오방수, 원댁이못 등 땅을 파기만 하면 샘이 솟을 만큼 물이 좋았었다.

 


 

* 고쳐 세운 도댓불 

 

 수돗물을 쓰는 지금은 장공물만 일제 때 정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필자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70대의 할아버지와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시원하다며 몸을 씻고, 그 옆에 악동(惡童) 둘이서 물싸움하며 놀고 있었다. 물이 나오는 곳에는 대정(大正) 15년(1926)에 세운 김신현(金信鉉) 치수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일대에 공원을 만들어 서쪽에 다시 새로 번듯한 목욕시설을 마련했다.

 

 그런데, 북쪽 옛 방파제의 도댓불을 찾았을 때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볼만했던 도댓불이 새로 번듯하게 복원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옛것은 1930년대 당시 애월어업진흥회장이던 송암 김봉하(金奉厦) 선생이 세운 것으로 본도에 몇 안 남은 도댓불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본래의 돌은 하나도 안 남기고 새 돌을 깎아 날이 서게 쌓았다. 당시 쌓은 돌담의 형태나 도댓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채.  

 


 

* 애월초등학교 정문 옆 울타리로 보수한 애월진성

 

▲ 서쪽으로 조금 남아 있는 애월진성

 

 애월진성 자리는 지금 애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서쪽으로 향한 학교 후문 남북 쪽으로 각각 30∼40m 정도 성체가 남아 있어 미약하나마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쪽 부분은 학교 건물과 민가가 바짝 들어서 그 모습을 살피기 어려우나 원형이 좀 훼손되었고, 북쪽 밖으로는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나 담쟁이, 계요등, 댕댕이덩굴이 성담을 덮고 있다. 이곳은 복원 차원이 아니라 보존(保存) 차원에서 깨끗이 치우고 관리한다면 당시 축성(築城)의 모습을 그런 대로 살필 수 있겠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 '애월성은 애월포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549척, 높이가 8척이고, 남쪽과 서쪽에 성문이 있다.' 그리고, 방호소(防護所)로서의 애월소에는 '성안에 객사와 군기고가 있다.'고 적었고, 수전소(水戰所)로서 애월포에는 '판옥전선이 1척, 비상양곡이 3석, 격군 118명, 사포 21명이 있다.'고 했다.

 


 

* 남아 있는 옛 하물의 일부

 

 '탐라지'는 1653년(효종4) 당시 제주목사였던 필자가 '동국여지승람'과 '제주풍토록'를 참고하여 편찬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지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도 나온다. '애월(涯月)에 사는 사람들은 말머리 같이 생긴 떼배를 구하여 채색한 비단으로 장식한 약마희(躍馬 )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고 보름이 되면 파하는데, 이것을 연등이라 하며 이 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 애월진의 군기를 점검한 '애월조점'

 

 1702년 11월 14일. 명월진성에서 출발한 이형상 목사 일행은 애월진에 도착하여 기나긴 순력의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밑에 쓰여진 내용을 보면 지방관으로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조방장 남해거(南海擧) 등이 배석하여, 성정군 245명과 진성의 군기(軍器)와 집물(什物), 목자와 보인 181명, 말 1,400필을 점검한 것으로 나와 있다.

 


 

* 변화된 애월 포구 모습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간략히 그려져 있는데, 북쪽으로 객사와 부속 건물, 남동쪽으로는 군기고, 가운데 원장을 설치해 놓고 밖으로는 5소장쯤에서 몰고 왔을 말을 매어놓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밖의 것으로는 남서쪽으로 치우친 사장(射場)의 과녁과 남서쪽으로 애월리의 민가가 그려져 있다. 고내포(高內浦)와 민가가 그려진 점도 특이하다.

 

 이보다 120년쯤 전에 다녀간 이원진 목사의 시를 보면 당시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탐라에 별성의 열리니
둘러싼 바다가 거울같이 맑도다.
일기는 상도(桑島)를 나누고
가을의 찬 기운은 목성을 감추도다.
망아지를 몰던 일은 벌써 옛일이며
감귤을 싸는 것은 지금의 정일세.
육지는 구름 낀 산 너머 머니
초조히 옥경(玉京)을 바라본다.

 


 

* 하물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오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