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한라산의 설경(雪景) (1)

김창집 2002. 1. 31. 12:28
△ 눈, 눈, 눈, 눈의 향기

1년 만에 다시 한라산에 눈을 보러 가기로 결정한 뒤부터는, 매일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나날이었다. 따뜻한 날이 계속되면 산에 눈이 다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고, 비가 오면 또 비가 오는 대로 안타까웠다. 더구나, 전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면서는 안절부절 못하였었다. 그러면서도 저것이 한라산에서는 낮은 기온 때문에 눈으로 변하리라는 확신을 가지러 애를 썼다.

눈! 눈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펄펄 내리는 눈은 이 세상의 추한 것을 깨끗하게 다 덮어버리고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고, 어디서 좋아하는 사람이 소리 없이 찾아올 것만 같다. 이럴 때,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는 우리를 깊은 적막 속으로 끌어들인다. 오죽하면 눈 내리는 소리를 ‘머언 곳에서 여인이 옷 벗는 소리’라고 표현했을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의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산천단을 지나고, 오라골프장에 다다를 때까지도 절망적이었다. 어제 내린 비로 눈은 다 녹아버리고, 검은 흙과 파란 잔디만이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개오리오름[犬月岳] 옆을 지나 교래리로 나뉘는 길을 넘어서면서부터 길가에 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성널오름[城板岳] 휴게소에 이르러서는 하얗게 빛나는 오름 위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벌써 관광 버스에서 내린 수많은 관광객들이 장비를 점검하면서 설레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 예술은 자연의 모방

바라던 한라산 등반이 이루어지는 찰라, 눈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처음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해서 걷는 것이 이상한지 관광객들의 목소리들이 한결 높아진다. 대부분 경상도 사투리다. 중년 부부들이 단체로 움직이고 있어 물으니, 울산에서 왔다고 했다. 나도 작년에 처음으로 아이젠을 착용했는데, 오래 걷다보니 평상시 사용 않던 발바닥 가운데 부분이 자극이 심했는지,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생겨 불편했던 터라 아이젠을 배낭에 둔 채 눈이 올 때 타이어에 뿌리는 체인 액을 뿌리니, 아주 편하다.

작년 2월 18일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너무 많아져 사람이 다니는 부분을 제외한 곳이 1m 이상 되어 있어 서로 교차할 때는 피하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그만큼은 안 되었으나 그래도 추월할만한 공간이 좁아 속도 내기가 쉽지 않다. 이곳 성판악 코스는 9.6km로 평상시 오르는 데만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지금 허용되어 있는 어리목․영실․관음사 등 4개의 코스 중 등반 거리가 가장 긴 반면, 비교적 평탄하다. 등산로가 숲에 가려 있어 전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봄철이면 울긋불긋 진달래가 자랑이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처음 오는 등산객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그러나, 고도를 나타내는 표석들이 모두 눈 속에 묻혀 있어 답답하다. 1.6km 오르고, 8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넘어설 때였다, 노루 한 마리가 휙 길을 가로지르고 숲 속으로 뛰어간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앞서 간 노루와 둘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뒤따라 오던 등산객들에게 알리니, 모두 좋아한다. 이곳은 비교적 눈이 덜 쌓여서 아직도 저놈들이 내려가지 않고 머물고 있구나. 주위엔 노루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노루가 나타난 곳을 지나면서부터 눈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3.5km 지점 속밭을 지나면서부터는 나무에 눈꽃이 만발하고, 잎이 지지 않은 나무엔 머리에 가득 눈을 이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지기 시작한다. 백산호 숲을 이룬 곳을 지나면서는 잠시 물고기가 되어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환상에 빠진다. 갑자기 햇빛이 드러나니 만발한 벚꽃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나무의 모양에 따라 꽃 모양이 달라지나 한결같이 순백(純白)이다.

조물주께서 이곳에 이런 작품을 만드느라 어제 아랫마을에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그렇게 천둥 번개를 동반하였나 보다. 어쩜 나무와 바람과 눈과 차가운 기운을 재료로 모아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 추운 줄도 모르고 한라산 가득 탄성을 질러댄다. 내려오는 사람도 오르는 사람도 지친 줄도 모르고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다. 세상에 이런 광경을 못 보고 죽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표정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모든 예술(藝術)이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계속)


<사진> 한라산의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