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신록의 숲길을 원 없이 걷다

김창집 2005. 5. 9. 01:05

--- 큰드레왓 답사기(2005. 5. 8.)

 


 

* 막 피어나는 참꽃

 

▲ 푸른 풀밭에서 꿩은 날아가고

 

 어버이날이 겹친 일요일, 모두 열 사람이 모였다. 고사리를 말하기에 큰노꼬메와 작은노꼬메를 가자고 했더니, 그곳은 4주째에 계획되어 있다고 해서 능화오름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탐라교육원을 지나 섬 문화 축제장 입구에 차를 세우고 9시가 다되어 검은기지로 오르는데, 고사리는 모두 피어버려 때가 늦었음을 알린다.


 그래도 능화오름은 멀고 가기가 힘들어 고사리를 꺾겠다고 구박사가 남는다. 올라가면서 바라보니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늦고사리들이 솟아 있다. 숲에 들어서자 참꽃나무 빨간 꽃이 우리를 반긴다. 지금 여기 막 피어나고 있는 것들이 몇 그루 보인다. 이곳에 이런 나무가 있는지 모르는데 나무들이나 풀은 꽃을 피움으로써 자신을 알린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춘란이 보고 싶어져 이리저리 살폈으나 하나도 없다. 내가 처음 능화오름을 가기 위해 이곳을 오를 때에는 상당히 많은 개체수의 춘란이 있었는데, 눈꽃 축제를 하면서 이 위 시험목장에다 썰매장을 만든 뒤부터 사라져 버린 것이다. 꽃이나 나무는 자연 속에 피어 있을 때 가장 생명력이 있고 예쁜 것을 왜 모르는지, 인간의 이기심이 미울 뿐이다.


 탁 트인 풀밭에 이르러서야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이 목초지에 이른 시기에 와보면 늘 노루 가족들이 보이는데, 고사리 꺾으러 온 사람들이 기척에 도망갔는지 하나도 없다. 넓은 목장에 새파란 풀들과 멀리 숲이 초록이 빛나는 걸 보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꿩 가족 3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숲으로 날아간다. 지금쯤 알을 낳기 시작할 때지만 싼 달걀이나 사먹고 주워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 보기 좋은 풀고사리


 ▲ 목장을 지나 숲으로

 

 다시 뒤로 돌아서서 멀리 시가지를 바라본다. 오늘은 어버이날이어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파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한없이 불쌍해 보이고 덩달아 오늘 여기 온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의 탁월한 선택에 대하여 감탄하는 소리들이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온다.


 연거푸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숲으로 들어갈 곳을 찾는다. 숲 입구에 커다란 관중고사리들의 솟아오르는 모양이 힘있고 아름답다. 그 옆의 풀고사리들의 모습도 그에 못지 않다.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싱그럽게 돋아난 곰취와 귀박쥐나물이 보이고, 으름꽃 떨어진 것이 재미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으름 익을 때 와서 따먹자는 말도 나온다.

 


 

* 싱싱하게 피어나는 귀박쥐나물


 여기에 오늘 사람이 다녀갔는지 두릅나무 순이 꺾인 자국이 보인다. 누가 초피나무를 건드려 향기가 숲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개족두리풀이 꽃을 피웠다. 꽃이라면 원색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녀석은 칙칙하게 검은 흙빛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 흙과 구분이 안 되어 곤란하다. 사람에 비유하면 영 어울리지도 않은 칙칙한 색깔의 옷을 개성이라고 입은 것 같다.  


 삼나무 숲을 지나 자연림 숲으로 가면서 잠깐 나침반을 꺼내 보았더니 동남쪽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서쪽으로 가고 있어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이게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동쪽으로 진행한 후에 동남쪽으로 가야 할 것을 서쪽으로 조금 이동한 생각은 않고 바로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덕분에 꿈에 그리던 큰드레왓에 다녀오긴 했지만.     

 


 

▲ 숲은 잠들지 않는다

 

 '숲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멀리 떨어져 바라보거나/ 막연한 생각에 잠기거나/ 그림으로 그려놓을 때가 아니다//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혈관 속으로/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다// 나무들이 흘린 땀이/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을 때다// 숲을 발견하는 것은/ 숲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있을 때다' -- 용해원 '숲을 발견한다는 것은'


 조릿대를 밟는 소리가 앞장 선 나의 귀에 바스락거리며 다가온다. 풀잎을 스치는 상쾌한 공기가 스쳐가고 눈을 들면 싱그런 초록이 시원하다. 눈에 먼저 띄는 나무는 물푸레나무과의 단풍나무와 고로쇠나무다. 이제 막 잎이 커진 이네들이 어린애 손 같은 잎을 바라보는 순간 어떤 꽃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표고의 숙주로 쓰이는 참나무와 서어나무도 그에 못지 않다. 이들의 푸름도 아직은 옅은 색으로 빛나며 눈을 얼얼하게 한다. 사오기라 불리는 산벚나무는 이제야 막 꽃이 떨어지며 잎사귀가 퍼지기 시작한다. 층층나무와 등수국은 그 잎사귀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닮았고, 겨울을 견딘 굴거리나무 위로 뽑아 올린 새순도 꽃 못지 않게 아름답다.


 조릿대 아래로는 가끔씩 사철란과 털사철란이 아직 걱정 말라는 듯이 모습을 보이고, 돌 위의 큰괭이밥도 꽃을 접은 채 바위 위에서 때를 기다린다. 조금 더 올라갔을 때 나타난 백작약 -- 지난 5일에만 왔더라도 싱싱한 꽃잎을 보았을 터인데, 몇 그루의 꽃은 떨어지고 몇 송이는 시들어가고…. 숲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이런 멋있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지고 있어 아쉬웠던 백작약

 

▲ 복효근의 시 '5월의 숲'처럼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내가 저이들과 바람이 나더라도/ 바람이 나서 한 사나흘 떠돌더라도/ 저 눈빛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내 생의 앞뒤를 다 섞어버리더라도/ 용서해다오/ 세상에 지고도 돌아와 오히려 당당하게/ 누워 아늑할 수 있는 그늘이/ 이렇게 예비 되어 있었나니/ 그대보다도 내보다도/ 또 그 무엇보다도/ 내 남루와/ 또한 그대와 나의 마지막 촉루를/ 가려줄 빛깔이 있다면/ 그리고 다시 이 지상에 돌아올 때/ 두르고 와야 할 빛깔이 있다면/ 저 바로 저 빛깔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저이들이랑 그대와 나와랑/ 함께 바람이 나버려서/ 저이들이 길어오는 먼 나라의 강물빛 아래 누워/ 서로를 들여다보는 눈빛에서/ 엽록소가 뚝뚝 듣게 해도 좋겠다/ 저 숲나무 빛깔로 그대로 저물어도 좋겠다'

 



 

 한 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아프다고 쉬어 가자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천천히 즐기며 가자고, 조그만 냇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위 속에 고인 물이 너무 맑아 컵을 달라고 해서 떠먹는 사람도 있었다. 하기야 오염원이 전혀 없는 이곳 엊그제 내린 빗물이 탈이 있을 리는 없고, 옛날 같으면 산에서 이런 물은 없어서 못 마셨다.


 앉아 쉬면서 보니, 나도밤나무 잎사귀의 잎맥이 너무 곱다. 저 속에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전에 TV에서 고로쇠 수액이 아닌 개다래 줄기를 잘라 비닐 호스로 받은 물을 약이 된다고 즐겨 마시는 장면이 있던데, 너무한 것 같다. 이 오름을 오르는 동안에 여러 그루의 고로쇠나무와 개다래나무를 볼 수 있었는데, 예로부터 제주도에는 그런 예가 없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 능화오름 대신 간 큰드레오름

 

 두 시간 여를 걸어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자 다리 아프다고 쉬면서 무얼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도시락을 싸고 다니지 않는 관계로 집에 있는 간식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오는 관례 때문에 오늘처럼 먼 곳을 오게 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달걀 삶은 것을 비롯 감자 삶은 것과 돼지고기 삶은 것도 있어 먹을 것이 풍성하다.


 술도 대부분은 담근 것이 등장한다. 오늘은 앵두주와 남오미자주가 등장했으나 마실 사람이 별로 없어 조금씩 마시고 그만 둔다. 오이, 떡, 백김치에 달래무침, 죄피지까지 가져왔다. 남아 고사리 꺾는 구 박사가 눈에 밟혔으나 어쩔 수 없는 일, 대신 빵을 남기고 적당히 먹은 다음 다시 출발했다. 한 참을 걸어도 정상이 나타나질 않자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큰앵초


 적송(赤松)이 많이 등장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큰드레오름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 더 이상 오름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금 서쪽으로 이동해 줄곧 남쪽으로 오르다 보니 그만 큰드레로 올라 버린 것이다. 족은드레와는 달리 이 오름은 오르는 사면이 밋밋하여 정상 부근에도 나무가 우거져 있고 평평한 편이어서 어디가 정상인지 모르는 곳이다. 


 오기 어려운 곳을 왔으니, 정상이나 보고 가자고 다시 앞장서 오르기 시작했다. 표고가 1628.4m에 비고가 140m이다 보니 우리가 거의 4시간 동안 얼마나 걸었는지 짐작도 안 갈 정도다. 정상 바위에 앉아 20분 정도만 자고 가자고 어른다. 누워서 나무를 보다가 새로 돋아나는 고로쇠 잎이 너무 아름다워 꽃 같다고 야단들이다.

 


 

* 아주 작은 열매가 열리는 아그배나무 꽃

 

▲ 내려오는 길에서 본 설앵초
 
 나 혼자라면 오름 뒤끝까지 가서 바위를 보고 싶지만 언제 한 번 Y계곡 쪽으로 올라 오름의 실체를 모두 확인해보리라 다짐하고 돌아올 준비를 서둘렀다. 내려오는 시각이 12시 47분이고 보면 두어 시간 후면 3시가 아닌가? 아무 것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는 구 박사에게서 전화가 자주 왔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가자고 나침반을 손에 쥐고 북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1702년에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큰드레왓과 작은드레왓은 방목장으로 표시돼 있다. 한라일보 대탐사의 내용을 보면, "한자로는 대두리봉(大斗里峰)으로 큰드레왓은 동쪽으로 탐라계곡 상류, 서쪽에는 Y계곡, 북쪽에는 아흔아홉골에 걸쳐 있는 고원지대로 들판처럼 평평하여 방목 적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사면에 깎아지른 듯한 선녀 바위가 버티고 있었고, 그 높이와 규모면에서 성널오름의 석벽보다 훨씬 크고 웅장해 보였다."고 했다.

 


 

* 요즘 한창인 줄딸기 꽃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우리가 얼마나 많이 걸어 올라갔는지 혀가 내둘릴 지경이었다. 1시간을 걸어도 조릿대의 나무숲은 끝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한 번 쉬었다가 계곡으로 들어섰는데, 거기서 곱게 앉아 우리를 반긴 것은 바로 큰앵초였다. 만개해 매혹적인 빛으로 조용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찍느라 한 동안 쉬었다가 나섰는데 얼마 없어 나무에 칠한 붉은 페인트를 발견했다.


 이는 벌초를 하기 위해 무덤을 알게 하느라 진입로로 표시한 것인데, 비닐 끈도 묶여 있었다. 거기서도 한 참을 걸어 드디어 풀밭으로 나왔는데 훨씬 서쪽으로 치우친 곳이다. 그 사이에 고사리가 솟아 있었고 아그배나무 꽃도 곱게 피어 있었다. 누군가가 모르면 무식한 거라고 알았으면 그렇게 용감하게 큰드레왓을 갈 수 있었겠느냐 해서 웃었다. 어떻든 다시는 가기 힘든 곳을 얼결에 다녀온 셈이다. 오후 3시 도착.     

 


 

* 내려와서 만난 윤판나물아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