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지리산 자락 답사 기행 (1)

김창집 2002. 3. 3. 13:39
민주화 운동의 성지, 5.18 묘역

▲ 무진기행(霧津紀行) ---안개 속에 묻어버린 2시간

광주공항은 첫 출발부터 우리를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인가? 9시45분 제주를 출발하는 여객기는 광주공항의 안개로 말미암아 언제 출발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답답했다. 더욱이 43명의 답사 팀을 인솔해야 하는 입장인 나로서는 항공사측이 자신들도 속단할 수 없다는 말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내 죄나 되는 듯이 전전긍긍했다. 항공사측은 자연 현상이니 당연하다는 듯 조금도 미안해하는 구석이 없다.

들락거리며 아는 친구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2시간 후인 11시 45분 출발로 확정이 되었다 한다. 광주로 가는 비행기가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다른 곳의 비행기가 이곳으로 온 다음 다시 그 비행기로 가야 하기 때문에 2시간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우려하던 일이 확정되고 보니, 두 시간이 아까웠다. 2층으로 내려가서 국립제주박물관의 이동전시관이나, 1층의 국립미술관 이동전시장을 돌아보기를 권했지만,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 할 코스를 생각해 보았다. ‘곡성 태안사’나 ‘노고단’ 둘 중 기사와 시간을 의논해서 하나를 취소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일행에게 알렸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넣어 12시 30분에 도착하면 곧 식사할 수 있도록 먼저 예약한 광주 결혼회관 식당 예약을 취소하고, 공항 가까운 곳에서 식사하고 출발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기사는 5.18묘역으로 가는 도중 '황금 뷔페'에서 식사하기로 예약을 해 놓고 있었다. 그 동안 숱하게 답사를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작년 여름 전북 지역 답사 때 태풍경보 때문에 완도에서 카훼리로 오는 코스에서 부랴부랴 청주공항으로 바꿔 비행기로 돌아온 일은 있지만.

문득 김승옥(金承鈺)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이 생각났다. 무진은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지만, 작가는 그곳이 '전남 순천과 순천만에 연한 다대포 앞바다와 그 갯벌'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의 무진은 일상성의 배후,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으로, 일상에 빠져듦으로써 상처를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강요하는 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괴로운 도시이다. 무진은 지도 위의 어느 곳도 아니면서도 도처에 널려 있는 도시이고, 일상에 밀려 변방으로 쫓겨난 아득한 도시이면서도, 문득문득 삶의 한복판을 점령해 들어오는 신기루의 도시이다.

소설에서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 없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장인이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전무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 있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무진으로 가지만 거기서도 허무(虛無)를 느끼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걸로 되어 있다.

여행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그 중 하나는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변화가 없는 일상에서 탈출하여 해방감을 맛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 중에 찬찬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이동하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 답사에 임하게 되는 소감과 바람을 말하게 한다. 돌아올 때도 공항으로 이동 중에 여행 중에 느꼈던 사항이나 건의 사항 같은 것을 말하게 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자신의 다짐을 말하게 되고, 그것은 여행 중 자신이 추구하는 여행 지침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비행기가 광주공항으로 내리는 도중 얕은 구름을 뚫는 순간, 조금 어찔했으나 활주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에서 서울로 돌아가면서 독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안개 속의 지리산 자락을 2박3일 동안 헤매고 다니다가 제주도로 돌아올 때는 다시 현실과 악수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 민주화 운동의 성지 -- 5.18 묘역

5.18묘지는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 34번지 5만여 평의 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떠한 핍박을 받더라도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행동하는 양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광주를 세계의 민주성지로 만든 5.18 민중항쟁은 의병활동, 동학혁명, 광주학생운동을 이어받은 광주인의 의로운 정신의 결집체로, 1997년부터 5.18묘지를 새롭게 단장해 성역화하고 5월18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면면히 이어오는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로 기록된다.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역동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한편, 인간의 자연권이 저항권의 정당성을 통하여 저항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공인 받았다. 그리고,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계승하여 5공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 하에서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결국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좌절이기 보다는 우리 현대사의 진전을 기약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5월 영령이 잠들어 있는 5.18묘지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를 갈망하는 세계인의 가슴속에 민주화의 성지로 굳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5.18 민중항쟁 추모탑은 5.18 묘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각기둥인 탑신은 높이 40m로 우리나라 전통석조물인 당간지주를 현대 감각에 맞게 형상화했다. 탑신 가운데 감싸 쥔 손 모양으로 중앙에 설치된 달걀 같은 타원형 형상은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에 반사된 빛은 희망의 씨앗이다. 유영 봉안소는 전통고분인 고인돌 형태를 응용하여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다가 희생된 분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다.

‘민주의 문’에서 ‘민주 광장’을 거쳐, ‘추념문’으로 들어가 ‘참배 광장’을 건너서 ‘5.18민중항쟁 추모탑’을 넘어서니 거기가 ‘묘역’이었다. ‘유영봉안소’에 분향한 뒤 ‘역사의 문’으로 들어서니, 7개 ‘역사 마당’이다. 그곳에는 먼저 정윤태와 박상호가 조각한 ‘임진왜란 때의 의병’의 모습을 시작으로, 배승현의 ‘동학농민전쟁’, 김왕현의 ‘3.1운동’, 김행신의 ‘광주학생 독립운동’, 오월조각회의 ‘4.19혁명’, 김희상의 ‘5.18민주화운동’, 김홍곤의 '통일 마당' 등 굵직굵직한 주제를 조각화한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기록들이 머리털을 쭈뼛쭈뼛 하도록 만든다. 5월 그날, 맨 가슴으로 총검의 숲을 헤치며 파도치듯 절규했던 자주와 민주와 통일의 염원이 저토록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서서 죽는’ 결의로써 맞섰던 기록이다. 우리 제주에서 4.3을 경험했던 분들은 다시 한번 몸서리치는 과거를 떠올리며, 그 때는 저보다도 더 처참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는, ‘노인에서 아이까지 무차별 학살당한 제주 4.3도 이곳처럼 인권 차원에서 해결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모두가 이땅에서 다시는 없어야 할 일들이 아닌가.
<2002. 2. 22. 14:00>

<사진> 5.18 민중항쟁 추모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