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답사기② 전주(全州), 조선 왕조의 본향(本鄕)

김창집 2001. 8. 29. 14:18

 * 전주 경기전 

 

□ 2001년 8월 17일 금요일 맑음

△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 전주 비빔밥

 답사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즐거운 일도 많지만, 또 하나의 기쁨은 그 지역의 별미를 탐닉하는 일이다. 향토 음식은 그 고장의 자연과 문화가 모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정작 그걸 안 먹어보고서는 완전한 답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지론을 나는 신봉(信奉)한다. 하긴 그걸 핑계삼아 맛있는 음식을 야금야금 즐기려는 의도가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곳의 토속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테니까.


 몇 년 전 백제권 답사를 마치고 전주 박물관에 들렸다가 광주 공항으로 귀향하는 일정이었는데, 마침 전주에서 점심 시간이 되어 비빔밥을 먹자는 제의에 따라 비빔밥집을 찾아 대형 관광버스로 시내를 몇 차례 돌았지만 찾지 못하는 바람에 시간만 허비하고 박물관 옆에서 해장국으로 때웠던 기억이 떠올라, 이번엔 버스 기사와 연락이 되자마자 먼저 비빔밥집을 알아보도록 했다. 알아본 즉 비빔밥은 야채만으로 된 것은 6천원, 고기까지 곁들인 제대로 된 것은 만2천 원이라 했다.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난번까지는 하루 식대를 6천 원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버스가 조금 싼값으로 계약이 되길래 8천 원으로 올려 책정했는데 그래도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려면 4천원을 어디서 챙겨야 했다. 조정이 될 수 있는 항목은 숙박비였다. 수 차례의 전화 끝에 남원에 있는 호텔 측과 1박1식으로 방을 계약하여 이미 8천원은 확보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소주나 맥주를 한잔씩 하다보면 그 예산도 녹녹치 않을 것을 예상, 단체라는 이유를 내세워 만2천 원짜리를 만원에 하도록 이미 계약해놓았었다.


 '비빔밥'이 처음 언급된 문헌은 1800년대 말엽의 <시의전서>인데 이 문헌에는 비빔밥이 '부�밥'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비빔밥은 한자로 '골동반(骨董飯)'으로 표기하는데, '골동(骨董)'이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이어서, 어차피 '이미 지어놓은 밥에다 여러 가지 찬을 섞어서 한데 비빈 것'이 비빔밥인 셈이다. 그래, 비빔밥이 어떤 유래를 갖던 결국 여러 가지 나물을 비벼 먹는 것으로, 각 지방마다 특산 농산물의 사용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특히 전주, 진주, 해주에서 향토 명물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전주비빔밥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꼽히는데, 전주비빔밥이 특이한 이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 아래서 생산되는 질 좋은 농산물을 사용한 장맛과 탁월한 재료에 있지 않을까? 전주의 콩나물은 전국 제일의 맛을 자랑하는데, 이로 인해 자연히 콩나물을 사용한 전주 콩나물 비빔밥이라고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전주 비빔밥에는 30여 가지가 들어간다고 했다. 주재료는 밥, 콩나물, 황포묵, 쇠고기, 육회(육회볶음), 고추장, 참기름, 달걀 등이며, 부재료는 깨소금, 마늘, 후추, 무생채, 애호박 볶음, 오이채, 당근채, 쑥갓, 상치, 부추, 호도, 은행, 밤채, 잣, 김 등이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뜨겁게 달군 그릇에다 고추장을 담뿍 떠 비비면서 땀흘리며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더욱이 특별히 준비했다는 갓 잡아 배달된 쇠고기 맛은 유별났다.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에는 흰수라, 팥수라, 오곡수라, 비빔 등 4가지가 있었는데, 비빔은 점심때나 종친이 입궐하였을 때 먹는 가벼운 식사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맛은 지금 먹는 것에 비교도 안되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 유래로 조사해 놓은 것도 재미있다. 우선 '임금 몽진 음식설'로,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임금이 몽진하였을 때, 수라상에 올릴 만한 음식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밥에 몇 가지 나물을 비벼 수라상에 올렸다는 데서, '농번기 음식설'로 농번기에는 하루에 여러 번 음식을 먹게되는데 그때마다 구색을 갖춘 상차림을 준비하기 어려워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음식을 섞어 먹게 되었다는 데서, '동학 혁명설'은 동학군이 그릇이 충분하지 않아 그릇 하나에 이것저것 받아 비벼 먹었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음복설'로 음복은 제사를 마치고 제상에 놓은 제물을 빠짐없이 나눠 먹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데 산신제(山神祭), 하제(河祭)의 경우에는 집으로부터 먼 곳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식기를 충분히 가지고 갈 수 없어 결국 제물을 골고루 먹으려면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제물을 받아 비벼서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묵은 음식 처리설'도 그럴 듯한데, 섣달 그믐날 새해 새날을 맞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음식을 장만하면서, 묵은해에 남은 음식을 없애기 위하여 몽땅 집어넣어 비벼 먹었다는 것이다.

* 봉안된 태조의 영정

 

△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豊南洞)
경사스런 터에 지어 태조의 영정을 모신 집 경기전(慶基殿)
사적 제399호로 경내에 5백년도 더 된 나무 그늘은
한여름을 넘기려는 노인들의 놀이터가 되어 그 경사를 누리고.

사극 '용의 눈물'을 촬영했다는 이곳 경기전에 모신
보물 제931호 태조의 영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전란이 끝난 후 전주 사고(史庫)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이곳에 유일하게 보존되어 지금에 이르는
고종9년(1872년)에 새로 그려 넣은 그림.

* 예종의 태실

 

정전은 지대석과 면석, 그리고 갑석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장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을 이루었다.

태종 10년(1410년)에 아버지를 모시고자 창건한 전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한 것.
뒤로 태조의 22대조이자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771년(영조 47)에 지은 조경묘(肇慶廟)가 있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부속건물들과 별전,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동재·서재·수복방·제기고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과 조산(造山)을 만드는 등 광범위한 것이었다.

사방의 아름다운 나무숲은
'용의 눈물'에서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장면을
촬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
나오면서 본 예종대왕 태실과 비석은
어느 스님의 부도인 양 허허로웠다.

* 풍남문 뒤편 '호남제일성'이란 현판이 걸렸다.

 

△ 전주읍성의 자취를 보여주는 풍남문

국보 제1호 한양의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버금 가는
전주읍성의 남문 풍남문(豊南門)
문을 축으로 로터리가 되어버린 보물 제308호
차를 세울 공간이 없어 빙빙 돌며 보다
내려 올라간 성루.

몇 번 울렸을까 저 종(種)
임진왜란 때나 몇 번 소리냈음직한 깨끗한 몸매
오늘 저 창살 안에 갇혀 있는 종이
울 줄 모르는 바보가 되버린 건 아닐까?

성문이라기보다 풍류를 일삼던 누각(樓閣)의 모습
초층 정면 3칸, 측면 3칸, 2층 정면 3칸, 측면 1칸
중층문루(重層門樓)의 팔작지붕 위에 앉은 비둘기가
배고픈지 힘없이 하품을 한다.

1768년(영조44) 건립한 것으로 전하는
한국의 문루 건축에서는 드문 형식의 기둥
공포는 주심포(柱心包)집과 같이 기둥 위에만 배치되었으나
그 짜임은 다포집 계통의 솜씨를 따르고 있는

우설(牛舌)도 역시 다포집과 같은 형태
공포와 공포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배치
이는 주심포집에서 변천된 익공(翼工)집 건축에서 시작된 새로운 부재
공포 하부는 용두(龍頭)를 조각한 조선 후기의 건축의 별미.

오늘 무슨 인연으로 여기 내가 서서
저 길옆 둘레에 늘어선 가로수
겁없이 잘 열린 은행 열매나 바라보면서
하염없는 풍류객의 되고 있는가.

* 풍남문

 

△ 조선시대 귀빈의 숙박소인 전주객사(全州客舍)

객사에는 이불 펴놓고 하룻밤을 묵을
피곤해 보이는 손님들은 보이지 않고
저녁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몰려들
어느 연주(演奏) 가족의 연습이 시작되는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객사
보물 제583호,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8작지붕 건물이 붙어
날아가는 듯한 독수리를 닮은

1473년(성종 4)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는
주관(主館)과 그 좌우에 양익헌(兩翼軒)을 가진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1914년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도로 확장공사로
좌측의 동익은 철거되어 현재는 주관과 서익만 남아 있다.

주관 정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풍패'란 한고조(漢高祖)의 고향 지명으로
그 후 왕조의 본향을 일컫는 말이 되었단다.
객사는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며
동익헌(東翼軒)은 귀빈의 숙박소 용도 외에 관찰사의 재판장으로도 쓰였단다.

오늘 이 자리에 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방관자로 그냥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픔을 뛰어넘는 한 증인의 입장에 서야 하리라.

* 전주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