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답사기① 익산에서 만난 불교(佛敎) 유적들

김창집 2001. 8. 22. 17:27

 *  해체 보수중인 미륵사지 석탑

 

□ 2001년 8월 17일 금요일 맑음

▲ 익산(益山)땅과 나와의 인연(因緣)

 내가 맨 처음 익산시와 인연을 맺은 것이 어렵고 힘든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서였다면 악연(惡緣)일까? 논산에서 기본 훈련을 마치고 배출되어 후반기 훈련을 받은 곳이 '영외부대'로 불리던 익산 땅 이곳 금마(金馬)였다. 양력 2월, 제주에서 자란 나는 겨울바람이 더없이 혹독하게 느껴졌고, 눈이 녹아 질퍽해진 진흙은 훈련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음력 설날, 우리는 수십kg 짜리 81M 박격포 포판과 포다리와 포열을 나눠 어깨에 매고는 조교가 시키는 대로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를 부르며, 포사격을 하기 위해 야외 교장으로 갔다. 그날 우리 훈련병들은 포탄에다 장약(裝藥)과 함께 향수(鄕愁)를 장착하여 멀리 산으로 날려 터트리곤 했다.

 그 뒤 다시 금마 땅에 발을 디딘 것은 20여 년이 지난 어느 여름 미륵사(彌勒寺)터 답사 때였다. 이번에처럼 군산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처음 다다른 곳. 눈앞의 용화산(龍華山)이 어딘가 눈에 익은 듯했다. 혹시 군대시절 우리가 향수를 터트리던 포탄의 과녁이 저 산이 아니었을까. 그날 안내를 맡은 이청규 교수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은 백제 무왕과 아내인 선화공주가 용화산 정상 조금 못 미쳐에 있는 사자사에 가는 도중 이곳 못에서 미륵삼존의 현신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절을 세우게 되었다.'면서 나더러 향가 '서동요(薯童謠)'와 그에 얽힌 전설을 얘기해달라고 했다.

 오늘은 <삼국유사>와 '서동요' 얘기를 나 혼자 맡아 하게 되었다. 이 어른들에게 '서동요'를 그냥 했다가는 시시하게 들릴 거고, 요즘 수준에 맞도록 번안해서 들려줬다. "알레리꼴레리 알레리꼴레리/ 알아 먹었네 알아 먹었네./ 선화공주는 맛동-님을 / 살-짝-꿍 불러 들여서 / 밤-마-다 안고 잔데요/ 밤-마-다 안고 잔데요." 시기와 질투의 효과를 노린 '소문내기 전법'의 원조인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번졌고, 결국은 진평왕의 귀에 들어가 일을 내게 되었다. 요즘의 학생들은 보통의 이야기로 들던데, 다 알고 있는 어른들이 오히려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 한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거친 벌판에 유일하게 나무 한 그루 있고, 그 옆으로 한쪽을 무자비하게 시멘트로 발라놓은 시커먼 탑이 볼썽사납게 서 있어, 그것이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의 미륵사지 석탑으로는는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건물을 해체 보수하려고 밖을 가려 널빤지로 대충 지어놓은 집이 껑충하게 서 있다. 덥기도 하고 일행들을 유물 전시관으로 모셔서 그곳의 안내 담당자에게 부탁, 현관 옆에 옛 모습을 50분의 1로 축소해놓은 절터 모형 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요즘 만들어놓은 전시관이나 박물관에는 이런 축소 모형이나 디오라마가 설치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동탑)

 

▲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그리고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는 용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추정 규모로는 한국 최대의 사찰지라고 했다. 601년(백제 무왕2)에 창건되었다는데, 국보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1993년에 동탑(東塔)이 복원되었다. 현관 벽면에는 일제 강점기 때 찍은 다 허물어지다 남은 탑의 사진을 확대해서 걸어놓아 부끄럽게도 우리 문화 수준의 치부를 보여준다. 물론 전쟁을 많이 치르기도 했지만 한꺼번에 뒤집어버리는 개혁을 일삼다보니, 새것만 좋아하게 되고 옛것은 짐이 되어 확 뜯어버린다. 유럽이나 일본 등지를 가보면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거리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던데.

 전시장을 돌아 나와 가건물 속으로 들어가서 미륵사지석탑을 본다. 이 탑은 백제 말기 화강석 석탑으로 사각형이었으나 서남 부분은 무너지고 지금은 북동쪽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 유행하던 목탑(木塔) 양식을 석탑(石塔)으로 바꾸어놓았다는 데 있다. 7세기초에 이르러 목탑의 전통이 이 지역의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양식상으로 볼 때 지금 남아 있는 석탑 중에서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되어 오히려 목탑의 양식까지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 절터를 발굴해본 결과에 따르면, 다른 절에서는 하나뿐인 금당(金堂)이 셋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이유는 못에 나타났던 세 분 미륵불을 하나씩 모시기 위한 것인데 용화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란히 있었으며, 그 앞에는 탑을 세워 놓았었다. 현장에서 보면 가운데는 신라 황룡사 9층탑에 견줄만한 크기의 목탑 자리가 도드라져 있고 건너에 복원해 놓은 동탑을 볼 수 있다. 이 동탑은 일부 남아 있는 서탑의 모형과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여러 가지 고증을 거쳐 세워 놓은 것이다. 실제로 2∼3%가 되는 옛 돌을 제자리에 그대로 쓴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붕 처마 네 귀에 매달아 놓은 36개의 풍경이 때맞춰 부는 바람에 두드려대는 소리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어쩌면 우리 문화에 대해 경종(警鐘)을 울리는 것 같다.

 양쪽 온전히 남은 2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작품으로 보물 제236호이다. 높이 3.95m의 지주는 약 9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어 그 사이에 깃대인 당간을 세우게 되어 있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인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이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멀리서도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 당은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도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에 왔을 때 집과 논밭이었던 절터를 사들여 연못도 파고 좋은 나무로 조경도 하고 잔디도 심고 다듬어서 넓고 깨끗하게 차려놓은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좋아, 나오다 답사객들에게 아이스크림과의 인연을 만들어 드리니 모두들 흐뭇해한다.

 * 고도리 석불(남쪽)

 

▲ 안녕하세요, 고도리석불 아저씨와 아주머니

 나는 익산 고도리 입구에 서있는 고도리 석불(古都里石佛)을 알고부터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내가 이곳을 지날 때는 그것은 거의 유적 답사일 때지만, 아무리 바쁘고 길이 멀더라도 이곳으로 돌아 돌부처 부부의 안부를 묻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46호 석불 2기는 화강석을 다듬어 만들어 놓았는데, 인정 많은 전라도의 시골 아저씨 모습 그대로다. 대부분의 불상이 둥그런 얼굴에 풍만한 몸집을 가진 위엄이 선 모습이지만 이 석상은 호리호리한 몸집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밀짚모자같은 것을 쓴 거부감 없는 모습이다.

 동산 위에 세워져 있어 꽤나 높아 보이지만 4.24m인데, 넓은 대좌에서부터 좁은 머리까지 완전히 길쭉한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하나의 석주(石柱)에다 대좌와 옷무늬, 손과 얼굴 등을 겨우 나타내고 있을 뿐이며, 불상이라기보다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인 석상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을 그려 넣어 매우 인상적이다. 목은 겨우 하나의 선으로 묘사하고 몸은 사다리꼴 석주에 불과할 뿐, 굴곡이 전혀 없으며 팔도 표현되지 않고 두 손은 간신히 배에 붙이고 있는 상태이다.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탑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데, 논밭 사이에 작은 몸집으로 서 있어 잘못하면 찾지 못하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200m쯤 떨어진 곳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남자와 여자 이 두 석상은 견우와 직녀 못지 않은 안타까운 전설을 갖고 있다.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던 두 부부는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어야만 만날 수 있으며, 서로 얼싸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의 울면 제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불쌍히 여긴 어느 기관장의 도움으로 지금은 논밭 사이로 오솔길을 내고 쇠다리를 놓아 남이 안보는 시간이면 쉽게 만날 수 있으렸다.

 비현실적인 조각수법, 그리고 도포 같은 옷이며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점 등은 분묘의 석인상(石人像)이나 문관석(文官石)과 비슷하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울 때 남긴 기록에는 "금마는 익산의 옛 고을터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유일하게 남쪽으로 터져 있어 물이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虛)함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이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의역할을 하는 사람의 석상을 세웠다 한다." 글쎄, 보통 사람의 수수한 모습일 성 싶더라니….

* 고도리 석불(북쪽)

 

▲ 보물을 품고 있던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

 불탑(佛塔, stupa)은 원래 '몸과 뼈[身骨]를 담고 흙과 돌을 쌓아 올린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초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만든 구조물'로서 시작된 것이다. 이는 BC 5세기초에 불교의 교주인 석가가 입적한뒤 그를 모시기 위한 분묘를 쌓았다. 즉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밑에서 입멸하자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다비(茶毘:火葬)하였다. 그러자 인도의 여덟 나라는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무력에 호소할 태세까지 보였는데, 이때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을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한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석가가 입멸한 지 100년이 지나 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은 불사리를 안치한 8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 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불전(佛典)과 인도의 학자들 사이에는 약간의 의견 차가 있다. 꼭, 탑의 모양을 띠지 않아도 사당(祠堂)이든 스투파이든 어느 것이나 불사리를 봉안한 것이면 일괄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석가의 입멸 후 신자들은 그를 숭배한 나머지 그의 진신사리를 탑 속에 안치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 공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널리 퍼지고 탑파가 더욱 많이 세워짐에 따라 극히 한정된 불타의 진신사리로는 그 많은 신자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석가의 머리카락, 불타의 손톱, 석가의 이[齒] 등을 봉안 예배하거나 석가의 옷이나 좌구(座具) 등의 유물로써 석가를 상징하는 본존으로 공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이것마저도 그 진위(眞僞)를 가려낼 수 없게 되자, 절대로 변함이 없는 석가의 유적지중 탄생지·초전법륜지·성도지·열반지 등 4대 성지(聖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곳에 탑파를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4세기 후반에 수용되었고 불탑의 건립 또한 인도에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을 거쳐 그 기술을 습득하였다. 한국에서 사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건립되었던 불탑은 그 초기에는 모두 목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목탑과 나란히 일찍이 삼국 말기부터 석탑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국내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것으로 600년경에 백제에서 비롯하였다. 미륵사지의 다층석탑과 부여의 5층석탑은 오늘날에 전래하는 한국 석탑의 조형(祖型)으로서, 그에 앞서서 유행하였던 목탑을 본받아 건립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석탑 발생의 사정은 이와는 다르다. 신라에서는 일찍이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이 건립되었는데, 이것은 안산암(安山岩)을 벽돌처럼 작게 잘라서 쌓았으며 그 양식 또한 중국의 전탑(塼塔)을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백제와 신라는 초기 석탑의 양식을 각기 달리하였다 하더라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계기로 이들 두 계통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되어 신라석탑으로서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한국석탑의 전형으로서 이후 고려·조선 시대를 통하여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는 불탑들은 그 건조 재료에 따라 목조탑·석조탑·전조탑·모전석탑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탑과 모전석탑은 건탑에 앞서 벽돌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수공 때문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지는 못하고 일부 지역에서만 세워졌던 것이다. 목탑은 그 자체가 목재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다 소실되어 실물이 전해지는 것은 없고, 현재는 그 터만이 각처에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석질이 좋은 화강암을 다량으로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석탑이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1,000여 기의 불탑 중 그 대부분은 석탑이다. 그러므로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왕궁리 석탑은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옛날 마한 때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구릉지에 우뚝서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제 석탑이다. 지금 주변은 발굴 조사로 온통 헤집어 놓아 정리가 안된 상태로 놓여 있다. 매미 소리 요란한 숲 사이로 보이는 보물 제44호의 석탑은 사각의 지붕이 나래를 벌인 듯 경쾌하다. 가까이 다가서니, 높이 8.5m의 웅장함이 돋보여 다가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왜소해 보인다.

 이 석탑을 손보는 과정에서 제1층 옥개(屋蓋) 상면 중앙에 장치된 방형석(方形石) 위에 뚫린 2개의 사리공(舍利孔)과 탑심(塔心) 초석 상면에 뚫린 3개의 사리공 속에서 유물이 나왔다. 국보 제123호로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는 사리장치 1식과 금제(金製) 판경(板經)은 1층 옥개 상면에서, 동불입상과 청동령(靑銅鈴)은 탑심 초석 사리공에서 발견된 것이며, 탑심 초석에 뚫린 '品'자형 3개의 사리공 중에서 1개는 이것이 발견된 1965년 12월 이전에 이미 도굴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어서 찌는 날씨에도 1층 옥개석을 쓰다듬으며, 도둑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국립전주박물관과 인연을 맺은 사리함과 사리병이 너무나 아름다워, 지난 번 전주박물관에서 오랫동안 그에 매혹되어 곁을 떠나지 못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 왕궁리오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