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그 많던 피뿌리풀은 어디로 갔을까

김창집 2005. 7. 2. 15:33

--- 도리미, 비치미, 백약이를 돌아보고(2005. 6. 26.)

 


 

* 비닐로 포장해 그냥 밭에 둔 목초 묶음들

 

▲ 자연을 거스르면 재앙이

 

 한라산 기슭의 오름을 오르기로 미리 계획된 날이었는데 장마가 엄습했다. 아침 일찍부터 창문을 열고 한라산 쪽을 바라보니, 비가 오는지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아! 오늘은 계획대로 진행하기는 글렀구나. 어디 풀밭 오름이나 올라야 하겠지.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며 문을 나서는데 그를 뒷받침하듯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요즘 떠날 시간에 임박해야 모이는 장소에 도착하는 버릇이 굳어져 버렸다. 어머님을 조금이라도 더 보살피고 가기 위해서라고 변명해 보지만 이제 그건 안 먹힌다. 그렇지만 그럴 때도 꽤 있다. 나오려 하다가도 이것저것 한 번 더 보살피려면 적어도 10분 이상 소요된다. 출발 5분전에 도착해 보니, 고 고문을 중심으로 미리 의논을 거쳐 우선 돌이미와 비치미로 결정한 상태였다.

 

 서쪽에서 바람이 부는 것을 보면 비가와도 그 쪽이 더 할 모양이고 보면 역시 경험이란 무시 못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곳으로 선뜻 동의해 버린다. 그러자 새로운 식물의 사진을 찍기 위해 동행하려던 분이 실망했는지 물러서 버리고 우리 일행 15명만 성읍2리를 향해 달렸다. 우리 모임에서도 사진 작가와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여럿 있음에도, 크게 내색을 않는다. 

 


 

* 안개 속에 푸르름을 자랑하는 비치미오름

 

 주어진 오름에 가서 기쁘게 자연을 맞아 운동량을 확보하면서 주어진 조건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오늘 내게 허여(許與)된 것이 이것이었구나 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주 보는 들꽃 한 송이도 예쁘고 소중하게 보인다. 괜히 욕심을 부려 억지로 밀어붙이다가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당장은 피해 넘어갈지도 모르나 그 버릇이 한 번 두 번 계속되는 한 어젠가는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 세상을 살면서 간과하기 쉬운 것

 

 남조로를 벗어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제법 잦아진다. 이왕 어느 정도의 비를 대비하고 출발한 15명은 우리 모임의 대표 주자인 양 당당하게 의심이 없다. 우리 모임에 들어온 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에 길들여진 몸들이라 비가 오면 차라리 빗속의 오름을 즐기려 든다. 빗속의 풀빛이 얼마나 싱싱한지 빗속의 꽃 빛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는 정말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성읍2리 마을을 지나 넓은 목장 정문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새로 다리를 길게 놓은 곳이 있는데, 꽤 넓기 때문에 비가 올 때는 이곳에 세워 걸어가면 좋다. 걸음을 아끼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리라. 먼저 큰돌이미를 향해 걸어가다가 소의 사료로 갈아놓은 풀을 베어놓은 밭을 지나게 되었다. 견고하게 자동 진공 포장된 건초 덩어리가 비닐에 싸여 아직도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 풀밭 능선을 걷는 일행과 정원수 같은 소나무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아스라한 것들이 오름을 둘러싸고 요술을 부린다. 개오름은 뿌리만 남아있는데, 차라리 그 오름 자체가 저렇게 늘 안개로 덮여 있다면 정말 매력적인 오름이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간과(看過)하기 쉬운 것이 눈앞에 드러나는 색에 현혹되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일이다. 세상과 차단한 채로 가까이서 깊숙이 바라볼 때만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1년생 더덕이 자라고 있는 밭과 콩을 갈았는지 아직 붉은 흙으로 남아 있는 밭 사이 두둑을 따라가다 철조망을 만났다. 앞에서 하도 안 가길래 기웃거렸더니, 옆에 좋은 통로가 있다고 한다. 돌아서 가보니 그쪽은 철조망이 더 견고하여 다시 돌아왔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 쓰라.'는 성경 구절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홉 형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사리가 하지(夏至)가 지난 밭 구석에 실하게 솟아 있다. 

 

▲ 안개 속에서 더욱 빛나는 오름들

 

 큰돌이미로 들어가는 마지막 철조망을 넘고 나서 철조망이 왜 그렇게 견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알았다. 많은 소를 가두어놓은 것이다. 암소들이 외부의 틈입자를 보더니 풀을 뜯다 말고 송아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모성의 본능을 오랜만에 느끼면서 갑자기 어머님 생각이 난다. 이제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보다 나이가 많아버린 이 자식을 멋모르고 '족은놈아!' 하고 부르는…. 


 


 

* 언제봐도 정겨운 암소와 송아지

 

 반포보은(反哺報恩)한다는 생각으로 몇 년째 옆에서 모시고 있지만 어렸을 적 어머님 사랑의 백 분의 일이나 갚고 있는지 늘 안심이 안 돼 안절부절못한다. 지난번에 '제주문화예술'지에 '소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 불로그에 올리기 위해 소들을 가까이서 담아둔다고 몇 컷을 찍었다. 하지만 시간이 급해서 멋진 사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간간이 피어 있는 서양에서 들어온 개민들레가 오름을 점령하고 있다. 거기다 반기를 든 것 중에는 돌가시나무 하얀 꽃과 보랏빛 꿀풀 꽃이 고작이다. 산딸기는 검붉은 빛깔로 익어 있지만 적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소나무 사이로 걸어가며 사방의 오름을 바라본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오름도 재미있고, 바로 붙어 있는 비치미는 안개 속에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바람이 세찬데도 불구하고 정상에서 사방의 오름을 조망한다. 오늘 보이는 오름들은 전에 보던 오름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쉽게 대하는 오름을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꼭 같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름은 늘 새로워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젯밤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그도 저도 아니면 누구를 만났거나 깊은 생각에 의해 새로워졌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대하는 것과 같다.

 


 

* 큰돌이미 찔레나무 속에 남아 있던 피뿌리풀꽃

 

△ 누가 오름을 훼손하는가

 

 이 오름에 오면서 내심 궁금한 것은 피뿌리풀 꽃이 어떻게 되어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행을 피해 동쪽 능선 아래로 살그머니 돌아갔다. 소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카메라에 담으면서 현장에 도착했는데, 피뿌리풀이 하나도 안 보인다. 소가 바로 옆에도 있는데 이 놈들의 소행일까?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살펴보니 두어 곳에 뿌리 부분만 남은 것이 있고 옆 찔레나무 속에서 결국 소에게 뜯기다 만 피뿌리풀 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오름을 다닌 지 10년이 넘었다. 초기에 보았던 희귀 식물들은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거나 눈을 씻고서야 볼 정도다. 그러면 그 것들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선 돈이 된다고 마구 채취해다 파는 할머니들이나 약초꾼을 지목한다. 비교적 낮은 오름마다 꽉 차 있었던 춘란(春蘭)이 5일장 할머니 품속에서 자주 보이더니, 오름에서 사라진 것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산에서 자라야 들꽃의 제 향기를 품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사거나 파다 심은 사람들---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누가 봐도 막무가내다. 그리고, 들꽃 동우회나 그 비슷한 난우회의 채취도 문제다. 전시회장에 가보면 산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 그곳에 많이 몰려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채취했단 말인가? 물론 회원이 키워 나눠준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이는 족족 캐어다가 심어 가꾼 것이 더 많을 것이다.


 


 

* 무덤에서 피어 나를 반겨준 잔대꽃 

 

 들꽃은 아무 손길도 필요하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가뭄이나 추위를 스스로 견디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있는 그대로 피어있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화려한 색의 장미꽃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곳에 내재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한결같다. 제발 부탁하나니 인간들이여! 들꽃은 집안의 화단이나 화분에서 키운 것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름다우니 캐가지 말고 현장에 찾아가 보자.

 

▲ 피뿌리풀꽃아! 어디 갔니

 

 비치미로 향하는데 한 줄기 폭풍과 함께 비가 쏟아진다. 일부러 능선 안쪽을 돌며 피뿌리풀을 찾았으나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소가 다 뜯어먹었는지 풀밭은 잔디밭처럼 길이가 짧다. 대신 키가 작은 낭아초만이 짙은 분홍빛 꽃을 조심스레 피워 올리고 있다. 저것들도 귀하고 약에 쓴다면 일시에 없어지고 말 것이다. 

 돌이미도 마찬가지고 이곳 비치미오름도 마찬가지고 귀찮은 개민들레만 늦게 드문드문 피었다. 저것들은 왜 싹쓸이 안 해 가나? 오다가 산소에서 잔대꽃을 만났다. 벌초꾼들의 낫질에도 끈질기게 남아 저렇게 꽃을 피워준 성의가 고맙다. 오늘 나와의 인연을 위해 기다려 핀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 예뻐 보인다. 옛날 던덕이라고 파다가 먹을 때도 있었는데….

 


* 무덤에 남아 존재를 지키는 옥녀꽃대

 

 비가 오는데 강행하려니 그렇고 막간을 이용해 쉬면서 새참을 먹기로 했다. 이런 때는 다리 아래가 제일이라고 모두 새로 놓은 길고 넓은 다리 아래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왔을 때면 몰라도 다리는 비를 피해 주어 안식처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넓은 바닥은 비에 젖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하기까지 하다. 오늘 한라산 기슭에 간다고 준비해온 음식들이 쏠쏠하다. 


 
 이왕 피뿌리풀을 찾아 나섰으니 작년에 많이 피었던 좌보미오름 기슭을 뒤져보고 나서, 백약이오름을 오르고, 이르지만 그럭저럭 오늘 산행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현장에 이르러 아무리 뒤졌으나 '혹시 장소를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년에 그렇게 많았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다. 오로지 고사리 아래 감춰진 변변치 못한 녀석 하나만이 고사리를 살짝 들어올리자 얼굴을 빼꼼하게 내밀고 아는 체를 한다.

 

△ 백약이에서도 사라진 피뿌리풀

 

 약초꾼들은 왜 싹쓸이를 할까? 이곳에서 하는 짓을 보면 오늘만 있고 내일은 없다. 오늘 나에게 들켰으니, 다음에 언제 만나랴 하는 식으로 안면 몰수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모두 캐 가는 것이다. 1∼2년을 내다 보아 작은 것들은 더러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번성하면 다시 캐 갈 생각을 해야 정상인데, 그렇게 우리 강산을 유린하고 멸종 위기 식물로 만들어야 시원한가 보다.

 


 

* 안개가 덮이고 있는 좌보미오름

 

 백약이로 가는데 좌보미는 안개로 차차 덮여간다. 모처럼 비가 와 조금 선선해진 틈을 이용하여 풀을 뜯다 말고 물먹으러 몰려드는 소들이 정겹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집에 암소와 송아지들이 많아 아주 가까이 했던 까닭에 언제 봐도 고향 냄새를 풍긴다. 백약이는 백가지 약초가 있다고 해서 오름 이름이 붙었는데, 이곳에서 피뿌리풀이 사라졌다면 그야 말로 큰일이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다른 건 몰라도 피뿌리풀과 산도라지 천국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죽 소와 말을 가두어놓는 목장으로 활용되면서 나무가 없는 곳의 많은 약초들이 사라졌다. 분화구 8부 능선으로 돌다가 비스듬히 바닥으로 내려가 남쪽 정상 봉우리 쪽으로 나오면서 천천히 살피며 피뿌리풀을 찾았으나 그림자도 안 보인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능선에 서자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를 날려버릴 기세다. 

 이젠 우리 모임에서라도 도채꾼을 막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다. 이제 오름에 오르는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사람이 많다 보면 그 중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도 섞였을 터. 산에서 보이는 족족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도록 각 모임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멋모르고 뽑아 비닐 봉지에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알아듣도록 설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많던 피뿌리풀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물먹으러 모여드는 백약이오름의 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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