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달하 노피곰 도드샤

김창집 2008. 9. 16. 02:43

 

○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비


오름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매년 1월 1일이면 해맞이, 추석 뒷날에는 달맞이를

빼놓은 적이 없기에 제13호 태풍 실라코 때문에 비가 내일까지 올 것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오후 3시에 모이는 장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태풍 때문에

머리 위의 신호등이 떨어질 듯 흔들릴 때도 그 밑으로 차를 몰고 간 적도 있다.


주말이면 두 번 정도 오름을 가다가 집에서 먹기만 하면서 TV나 지키고 컴퓨터나

두들기며 앉아 있으려니까, 눈이 피곤해져 머리가 아프고 소화불량이 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 비가 오더라도 오름을 한 바퀴 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갔는데, 회장 가족이 먼 저 와 있어 의기가 투합한 세 사람은 다랑쉬로 달렸다. 

 


대천동 사거리에서 송당 가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 비가 가늘어지면서 오름이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여 ‘혹시’ 하는 기대에 부풀게 했다. 비가 올 때면 항상

구름에 가리던 다랑쉬오름도 상큼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 우리를 맞는다.

오름 마니아인지 이제 막 미치기 시작했는지 두 분이 먼저 와 오름에 오른다.


오기를 잘 했다 싶어 올라가서 한 잔 할 것도 챙기고 비에 대비할 복장을 갖춰

처음으로 갈지자로 만든 등산로에 오른다. 꽃을 찍을 사진기를 안 가지고 온 것을

비웃기나 하듯 비를 맞은 청초한 들꽃들이 마구 출동한다. 올 처음 보는 야고가

곳곳에서 떼로 나타나고 산비장이가 촉촉이 젖어 분홍색이 더욱 짙어 보인다. 


 

하얀 색의 뚝깔과 바디나물이 싱싱하고, 여기저기 절굿대도 보인다. 나비나물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민다. 쥐손이풀은 비를 맞고 엎어져 있는데, 솔체꽃도 많이 퍼져 있고 

억새가 피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며느리밥풀 꽃까지 나서 나에게 시위를 한다.

이것만 보아도 본전을 뽑았는가 싶은데, 날씨 나쁘다고 안 나온 분들은 뭐하고 있을까?


동쪽에서 솔솔 바람이 불면서 구름을 살살 걷어가니, 이거 이러다가 대박 나는 게

아닐까 하고 ‘정읍사(井邑詞)’를 뇌까린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는데 졈그럴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동쪽은 벌써 환해져 있고, 구름이 용눈이오름에서 일어나 높은오름을 거치는 듯

별나게 흘러간다. 잘못해서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된 회장이 탄식을 하는데, 변화하는

주변 흐름을 담느라 내 카메라는 불이 난다. 한라산 아래로 부드러운 곡선의 오름 능선이

주르르 펼쳐지니, 저기다 노을의 붉은빛만 더해준다면 얼마나 황홀하랴 싶었다.    


그걸 기다리면 한 잔 하고 다시 한 잔을 보탠다. 어둑하지만 일출봉과 우도, 그리고

지미봉 위에 걸쳐진 구름의 조각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이 때 마지막 해가 구름을

빠져나와 막 수평선을 넘어간다. 저것이 김영갑 씨가 말한 ‘삽시간의 황홀’일까 싶게

짧은 시간에 비쳐졌고, 이 디카로는 그 황홀함을 표현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그 동안에 어떤 부부가 올라와서 능선을 두 바퀴 돌고, 우리도 달을 기다리며 한 바퀴

더 돌았다. 여섯 시가 넘고 어둠이 짙어져 구름은 다시 동쪽 하늘을 가려 버린다.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언제 올라왔는지 젊은 번개 팀들이 다가

온다. 인사를 건내며 우리는 천천히 내려와 계단이 보이는 시간에 하산을 완료했다.


오면서 생각해보니 비가 와서 덥지 않게 운동량을 확보해 좋았고, 싱싱한 꽃들을

만났으니 충분히 노력한 대가를 뽑았다. 멋진 장면들을 보았으니 그것만 해도 집에

앉아 있는 분들보다는 훨씬 좋았다고 생각한다. 집에 와 샤워를 끝내고 사진을 골라 글을

쓸 때쯤 창문 너머로 달의 얼굴이 보인다. 22:34. 방충망을 젖히고 접사용 100mm

렌즈를 들이댔다. (아래 두 사진) 이후에 달은 다시 구름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 내 가슴에 뜨는 달 - 김태일


별 같이 많은 날

뻐꾸기 둥지에서 살 비비며 살 때

그 땐 몰랐더니

떠나고 보니 그립구나


어느 달빛 밝은 밤

선녀 날개 달고

오똑 코에 커단 눈 반짝이며

살짝 미소 지어

살그머니 날아든 너


그래, 진경아

이 세상 존재하는 건 모두 빛이란다

지금도 네 눈 반짝이겠지?


네 잠시 떠난 후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 듯

사각사각

이 빈 가슴 가득 울려 퍼지는

달빛 내리는 소리


떠나야 아는가 보다

차마 몰랐더니

자석처럼 자꾸 북녘으로 가는 눈길

창문마다 너의 달빛



 

♧ 가슴에 뜨는 달 - 이유리

 

그대는 무성한 녹음

쉬이 잠들지 않는

쪽빛 푸르름으로 출렁이는 데


겨울은 어느 새

거친 나그네 손길로

내 입술 훔치러 달려온다


거리마다 수군대는 바람...

그대 향기인양 가만가만 호흡하면

그리움은 슬픔으로 일다 분분히 흩어지고..


사랑을 사랑할 수 없을 때는

환한 대낮에도 가슴엔 달이 뜬다


헐거워진 하루..

낯선 타인처럼 멀어져 갈 때

어둠은 내 가슴에

별 하나 심자며 서슴없이 손 내밀겠지

 


♧ 호수에 달로 떠서 - 홍인숙(Grace)

    

내가

호수에 달로 떠

홀로 옷깃을 적시며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 이름 부르지 못할 때


꽃도 아닌

나무도 아닌

그대 살아서 숨쉬는

어딘가에


내가

호수에 달로 떠

꼭꼭 숨어버린

그림자 찾아

빨간 가슴으로 남아질 때


 

우르르,

우르르,

나를 부르는 소리

스쳐 지나는 바람이려나

하얗게 감아도는 밤파도처럼


내가

호수에 달로 떠

홀로 옷깃을 적시며

멀리 멀리서만

부르는 그 이름


그대 살아서 숨쉬는

어딘가에

목숨처럼 매달린 이름.


 

♧ 허공에 달 하나 떠오르면 - 허성욱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랑입니다. 허공에 달 하나 떠오르면 일천 강 일만 강에 떠오르듯이 당신의 사랑도 우리의 가슴속에 그렇게 비치고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아득한 어느 먼 날까지 그렇게 환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임이시여, 두려워 떨던 일들은 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빈 곳 없이 꼭꼭 찬 기쁨의 시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 Amour Secret (숨겨놓은 사랑) - Hel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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