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대정읍오름 위로 부는 바람

김창집 2007. 3. 28. 00:15

-- 녹남봉 보로미 돈두미 가시오름 모슬봉 동알 섯알오름 답사기

 

 * 녹남봉 분화구에 밭을 일구어 나무를 심었다.

 

▲ 1년에 한 번 인사 가는 심정으로

 

2007. 3. 11. 일요일. 흐림. 매달 두 번째 일요일은 해변에 위치해 있어 평소에 잘 가지 못하는 오름을 찾아 안부를 묻듯이 돌아보도록 계획되어 있다. 올 들어 첫 번째는 서귀포, 두 번째는 남원읍, 이번엔 대정읍의 오름들이다. 꽃샘바람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아직도 쌀쌀한 날씨. 11명의 답사단은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평화로를 통해 동광검문소 6거리에서 오설록 녹차 박물관 옆으로 첫 목표 오름인 녹남봉을 향한다.  

 

 녹남봉(녹남오름, 樟木岳, 樟木峰)은 대정읍 신도리 1304번지 일대에 자리한 표고 100.4m,  비고 50m, 둘레 1,311m, 면적 124,498㎡, 저경 448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산정에 오름에 비해 커다란 원형분화구를 갖고 있어 마을에서는 이를 '가메창' 이라 부른다. 어디나 그렇듯 가마솥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바닥(창)의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 들판 위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녹남봉

 

 예전에 녹나무가 많았다 하여 녹남봉 또는 樟木峰(樟木 : 녹나무)이라 했다는데, 근거가 희박하다. 과거 녹나무는 제주 동부지구 해안에 주로 자생하였으며 서부 지구에는 녹나무가 보기 힘들다. 곳곳에 소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상록수로는 까마귀쪽나무가 많이 퍼져 있고, 후박나무나 광나무, 보리밥나무, 팔손이가 곳곳에 보인다.

 

 낙엽수로는 예덕나무와 보리수 정도이고, 나머지는 가시넝쿨이나 억새와 띠로 덮여 있다. 일정한 곳에 치자나무를 심어놓은 것인 확인되었고,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던 굼부리에는 밀감나무를 베고 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맞지 않았는지 안에 새로운 작물로 바꿨다. 둘레에 산책로가 나 있고 운동기구도 몇 개 설치해 놓았다. 북쪽으로는 까마귀쪽나무를 둘러 방풍림으로 그밖에 대나무도 보인다.

 

 * 녹남봉의 한 무덤을 지키는 동자석

 

▲ 해변에 위치한 작은 두 오름 - 보롬이, 돈두미

 

 일제 강점기 결7호 작전의 산물인 듯 동북쪽 인공굴을 살피고 돌아서는데 아무래도 모슬포의 하늬바람은 아직도 차다. 남쪽 시야가 트인 곳에 서서 한라산 쪽으로 바라보았으나 구름에 덮여 있고 산방산을 비롯한 안덕면의 오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능선 산책로를 돌아 내려오는데, 경사가 급한 남서쪽 비탈에 풀을 벤 곳이 눈에 들어오고 아래 무덤에는 깊이 박혀 얼굴만 내민 것 같은 동자석이 우리를 배웅한다.

 

 오름에서 내려와 일주도로에 나와 왼쪽 길로 접어들자마자 곧 무릉리 전지동으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로 접어들었다. 보름이 오름으로 가기 위해서다. 보롬이(望山, 望月峰)는 대정읍 무릉1리 3526번지 일대에 자리한 오름으로 표고 49m, 비고 14m, 둘레 446m, 면적 15,717㎡, 저경 147m의 마을 뒷동산 같은 오름이다. 소형의 원추형 화산체인 보롬이는 정상 부분을 제외하고는 비고가 낮아 오름 중턱까지 농경지로 조성되어 있다. 

 

 * 제터가 있는 조그만 보로미

 

 주변은 밭으로 평평하고 넓은 평야지대여서 이곳이 그래도 마을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한다. 들어가는 길 옆 밭에는 팔지 못한 무가 개쑥갓과 뒤엉켜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오름에는 좁은 공터가 있고 그곳에는 노란 벌노랑이가 밝게 피어 우리를 맞았다. 이곳은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예덕나무와 우묵사스레피, 가시덩굴 따위가 섞었다. 그곳에서 나온 일행은 해안도로로 나가 돈두미로 향했다.  

 

 돈두미오름(돈대미, 돈도름, 敦頭岳, 墩臺山)은 대정읍 영락리 1450번지 일대에 자리한 표고 41.9m, 비고 22m, 둘레 1,571m, 면적 116,242㎡, 저경 463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오름 입구에서 고사리가 막 솟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바야흐로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느꼈다. 오름의 형태는 둥그스름한 구릉지대와 같이 납작한 모양으로, 산정부는 침식으로 해체되어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곳곳에 예덕나무가 들이 찬 돈두미는 평평한 편이라 곳곳에 개간을 해 놓았고, 보기보다 무덤이 많은 오름이었다. 북쪽 일부에는 가시넝쿨 따위 잡목에 먹구슬나무, 보리수나무, 팽나무, 꾸지뽕나무 등이 섞였다. 어떤 무덤에는 비석에 돈두악(豚頭岳)이라 새겨 놓아 '돗대가리오름'이라고 고소(苦笑)했다. 남쪽으로 나오면서 보았더니, 왕모람과 송악, 상동나무도 있었다.

 

 *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돈두미

 

▲ 정상부를 깎아 평평하게 된 가시오름

 

 이번에는 남쪽으로 일주도로를 한참 동안 달려 동일리에서 비스듬히 난 길로 가시오름으로 갔다. 가시오름(가스름, 加時岳, 可是岳)은 대정읍 동일리 1209번지 일대에 자리한 오름으로 표고 106.5m, 비고 77m, 둘레 1,874m, 면적 263,868㎡, 저경 676m의 제법 큰 오름이다. 오름을 목장으로 활용했었기 때문에 입구에 축사(畜舍), 북쪽에 급수 탱크가 시설되었으며, 서쪽으로 일부 밀감나무 과수원이 조성되었다. 

 

 정상에는 군사시설을 하려고 정지 작업을 하다가 큰 뱀이 나타나고 사고가 났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일제 강점기하 결7호 작전의 산물인 인공굴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곳을 전부 평탄 작업을 해놓아 넓은 대지로 조성되었으며 소나무가 보기 좋게 몇 그루씩 무리 지어 서 있다. 지금 그곳에는 광대나물이 빽빽하게 자라나 보라색 물결을 이루고 있다

 

 * 분화구를 평평하게 정지작업한 가시오름의 소나무들

 

 동남쪽 사면은 다소 가파르고, 서북쪽사면은 대체로 완만한 사면을 이루면서 남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까지 농로가 나 있다. 박용후에 따르면 예전에 이 오름에 가시나무(물참나무)가 많았다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하며, 가시낭(가시나무)은 보통 상수리나무 또는 물참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등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런 나무가 많았다는 근거는 지금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식생은 다른 대정읍 지역 오름과 비슷해서 소나무를 주로 하고 보리수나무와 예덕나무도 간간이 있어 가시덩굴과 어울려 다니기 불편했는데, 가시가 많아서 가시오름인 줄 알았다. 정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주변 경치를 바라본다. 바로 눈앞에 모슬봉이 자리하고 그 오른쪽으로 가파도와 마라도가 바다에 둥둥 떠 있다. 모슬포 지역은 오름이 그리 많지 않고 해안지역의 단구지형과 평야지대로 이어져 있어 오름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 가시오름에서 본 모슬봉

 

▲ 대정읍의 중심 축을 이루는 모슬봉

 

 대정읍은 중산간 아래로 위치한 고을이어서 산악지대가 없고 단출하다. 그래서 지역의 넓이도 좁고 비교적 평평한 대지 위에 솟은 몇 개의 오름만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그 중 대정읍 상모리 3540-2번지 일대에 자리한 모슬봉(모슬개오름, 摹瑟峰)은 표고 180.5m, 비고131m, 둘레 5,276m, 면적 453,030㎡, 저경 1,732m이어서 오르면 주변을 샅샅이 살필 수 있다. 

 

 동일 등고선 상의 어느 지점으로부터도 정상까지의 높이는 물론, 오름 사면의 길이가 서사면 상부 쪽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높이로 둘러져 있는 대칭적 경사를 이루는 전형적인 원추형 화산체이다. 이러한 형태는 아이슬란드식 화산체(icelandic volcano)와 그 외형이 유사하지만, 화산체상에서 층서 구별을 할 수 있는 노두(露頭)가 존재하지 않고, 그 지질단면상에 용암유출 단위 인정 때문에 아직까지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무리다. 

 

 * 모슬봉에서 본 단산과 산방산

 

 오름 정상에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서 남동으로 저별(貯別, 송악산) 봉수, 북서로 차귀(  遮歸, 당산) 봉수에 응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군사시설이 들어서서 자취를 확인할 수 없다. 동쪽에서 남쪽을 둘러 서쪽까지는 공동묘지로 되어 있고, 일정한 높이 아래로는 밭이 조성되어 있어 사방에서 공동묘지로 통하는 길과 농로가 나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급한 경사 길을 올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쌀쌀한 바람을 뒤로하고 무덤 옆으로 오른다. 올라 봐야 철조망까지이지만 전망이 좋은 곳이어서 단산과 산방산이 겹친 그 뒤로 멀리 한라산까지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서귀포 앞 바다의 섬까지 보이고 앞으로 형제섬, 송악산을 둘러 오른쪽으로 가파도, 마라도가 납작하게 보인다.

 

 * 납작하게 보이는 앞 가파도와 멀리 보이는 마라도

 

▲ 나지막한 동알오름, 섯알오름 사이에

 

 동알오름(東卵峰)은 대정읍 상모리 153번지에 자리한 표고 45m, 비고 30m, 둘레 1,283m,   면적 82.517㎡, 저경 463m의 아주 작은 오름이다. 여러 번의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송악산이 옆에 있어 알오름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송악산 응회환 외륜의 북쪽에는 작고 나지막한 3개의 말굽형 화구가 나란히 줄지어 분포되어 있다. 

 

 산이수동 마을 가까이에 있는 것이 위치상 동쪽에 있다하여 동알오름이라 하며, 비행장 근처 동네인 '알드르'에 붙어있는 오름을 섯알오름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주변의 오름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동알오름과 섯알오름 사이에 말굽형의 알오름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알오름의 남동쪽으로는 산등성이로 이어져 송악산 입구와 산이수동 포구 입구로 내리지르는데 이 또한 침식된 형태의 산체일 가능성이 있다. 

 

 * 동알오름과 섯알오름 사이 봉우리의 대공포 시설

  

 이곳에 분포하고 있는 오름들은 송악산 외륜에서 일정한 선상배열을 보여 주고 있고 원형의 분화구가 침식되어 원래의 형태가 대부분 파괴되어 있다. 오름은 대부분 풀밭오름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는 온통 묘지(공동묘지)로 가득 차있고 등성이는 소나무가 조금 심어져 있으며 농경지도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 화산체에는 두 개의 대공포 시설과 기다란 굴이 있다. 

 

 제주도 무문토기 유적이 발견된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은 '상모리식토기'라 명명하여 고고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 관광을 위한 선박대합실이 있고 그 너머에는 절울이(송악산)가 있다. 최근 이곳에서 가까운 산이수동 바닷가에 사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자국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 북쪽에서 본 동알오름

 

▲ 아픈 상처를 가진 섯알오름

 

 대정읍 상모리 1618번지에 자리한 섯알오름(알봉, 西卵峰)은 표고 40.7m, 비고 21m, 둘레 704m, 면적 29.094㎡, 저경 252m의 아주 작은 오름이다. 송악산 응회환 북쪽에 제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곳에도 알뜨르 비행장을 지키는 대공포 진지가 남아 있다. 일제 시대 때는 비행장·탄약고·격납고 등의 시설, 광복 이후에는 예비검속에 의한 주민 학살 등 제주민의 한이 서려있는 오름이다. 그 당시 흔적은 이 오름 기슭에서 발견할 수 있다. 

 

  5·16쿠데타 이후 멀리 떨어진 곳에 강제 이장됐던 백조일손 유해는 40여 년만에 제자리를 찾아 한 곳에 안치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예비 검속으로 구금됐던 347명의 구금자 중 252명은 그 해 8월 대정읍 섯알오름 부근에서 무참히 학살당한다. 당시 유족들은 당국의 강압으로 인해 유해 수습에 나서지 못한 채 사건 발생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겨우 유골을 수습해서 현재 묘역에 132위의 시신을 안장하고 묘비를 건립,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 중간오름에서 본 섯알오름

 

 하지만 5·16쿠데타 직후 군 당국의 묘역 해체 요구에 의해 일부 유족들이 야음을 이용해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세워 놓았던 비석도 누구의 손에서인지 모르지만 조각조각 부서져 있다. 오랜 세월 한 구덩이 속에 뭉쳐 있던 시신(屍身)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맞출 수 없어 어림짐작에 의해 맞춰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오랫동안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자 유족끼리 힘을 합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명예회복 시켜야 한다고 '백조일손지묘'로 불리어졌는데, 이는 100여 조상의 무덤은 맞는데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자손의 입장에서는 100여분의 조상이 모두 자신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이분들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도내 주요 기관장이 빠짐없이 모두 모여들 정도로 명예가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 예비검속 원혼들의 비극을 지켜본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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