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사랑 시집 ‘적막 한 채’에서

김창집 2015. 6. 22. 08:47

 

이사랑 시집 ‘적막 한 채’.

임보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한 추천의 글을

이렇게 썼다.

 

‘이사랑 시인은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농촌으로 내려가

홀로 둥지를 틀고 있다.

어쩌면 시를 무기삼아

자신만의 맑은 공화국을 세우고 있는 것도 같다.

그 나라의 시인은 촌로村老, 짐승, 나무, 들풀…….

숨어사는 하찮은 생명들이다.

그의 시는 이들에 대한

짠한 사랑의 노래들이다.’

 

시집에서 시 다섯 편을 옮겨

요즘 한창 산야에 피어나는

하늘타리 꽃과 같이 올린다.

 

 

♧ 풍경 속에 들다 - 이사랑

 

어느 날

풍경 속으로 도망쳤다

 

현재로부터 옛날로

도시로부터 산골로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

자본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하늘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땅으로

누군가 버리고 떠난 집으로

 

그들이 올라간 길을 거슬러 내려와

꿈속으로 고독 속으로 바람 속으로

적막 속으로 고요히

 

뿌리 내려

비로소

풍경이 되었다.

 

 

♧ 바늘 끝에서 피는 꽃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 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 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 주포항

 

물때도 모르고

고동이나 줍자고 나섰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방파제까지 파도가 너울너울

손에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파도가 렁출렁출 물고기 떼를 몰고

춤을 추며 들어오고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갔나?

 

주모 없는 술집의 술항개포구

호리병에 막걸리가 가득해서

돌머리 해변에서 술을 마시고

벌컥벌컥 바다를 마신다

 

해당화 붉게 피고 내 얼굴도 피고

 

 

♧ 부추밭 풀 매기

 

앞산 뒷산 뻐꾸기 웁니다

부추밭 혼자 매고 있습니다

부추보다 풀이 배는 많습니다

부추밭이 아니라 풀밭입니다

땡글땡글 햇볕이 쏟아집니다

잡념을 뽑듯 풀을 뽑다

뒤돌아보니,

 

세상 참 고요합니다.

   

 

♧ 소

 

가자가자 이랴이랴 서서 워워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고 소통하던

 

그들은

코뚜레 대신 귀때기에 수감번호를 달고

철장에 갇혀 종신형을 산다

자본주의의 돈줄에 매여 슬픔보다

체념을 먼저 배웠다

본능은 굴욕적으로 거세되어

종자 받기는 수의사 몫이다

 

어미가 돈을 낳고

돈이 또 돈을 낳고 또 낳고

이상적으로 완성된 죽음의 무게는

고깃덩이 삼사백 근으로

마지막 출소일은

병들어 죽거나 팔려가는 날이다

 

들판에서 그들이 떠난 뒤

밀 보리밭 풍경이 사라지고

아지랑이의 춤이 사라지고

종달새의 노래가 사라지고

자운영 꽃밭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