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7월호와 풍란

김창집 2015. 7. 3. 18:21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7월호가 나왔다. ‘권두 에세이’는 박흥순의 ‘함축, 독창, 진실로 통하는 시와 그림’, ‘신작시 14인 選’은 임보 김동호 주경림 김세형 나석중 최윤경 박성우 장수라 김서희 민구식 채영선 정와연 조희진 최선옥의 시로 꾸몄다.

 

  '이무원 추모 특집'은 임보 나병춘 박승류 이승희 이서하의 추도시를 싣고, 고인의 유작과 홍해리의 시론을 덧붙였다. 그리고 홍해리의 특별기획 연재시 ‘치매행致梅行’과 이인평의 기획연재 인물시는 여전하다. 산림문학 동인의 초대시에 이어,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임미리의 시 10편과 시작노트를 올린 다음, 조영임의 한시한담과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가 이어졌다.

 

  지금 한라수목원 난실에는 풍란(風蘭) 꽃이 한창이다.

  시 몇 편을 골라 사진과 함께 싣는다.

   

 

♧ 이리 서둘러 가신 뜻이 무엇인가요 - 임보

   ―소강(素江) 이무원 시인 영전에

 

엊그제 그렇게도 정정한 얼굴로 만나

시낭송도 하고 희희낙락 담소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보기 싫다고

인심이 너무 각박해서 견디기 힘들다고

그렇게 서둘러 떠나시나요?

 

당신처럼 바르고 곧은 정신을 지닌 교육자가 어디 있으며

당신처럼 맑은 시정을 지닌 시인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이 시대에 만나기 어려운 고결한 선비였습니다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한 권의 시집을 헌사하기도 하고

좋은 친구를 위해서는 한평생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의인이며

단체를 위해서는 멸사봉공 최선을 다한 지혜로운 리더였습니다

 

특별히 물의 본성을 즐겨 노래한 물의 시인이어서

사람들은 당신을 상서로운 비라 하여 ‘瑞雨’라 호칭했고

나는 당신을 맑은 강이라 하여 ‘素江’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묵향 속에서 붓으로 늘 마음을 가다듬던 瑞雨시여,

세상의 울적함을 맑은 시심으로 달래던 素江이시여,

당신이 떠난 이 빈 자리는 너무 적막하기만 합니다

 

瑞雨, 素江이시여! 비록 저 세상에 가셨습니다만 때로는

상서로운 비로 내리시어 이웃들의 처진 어깨도 만져 주시고

맑은 강물로 찾아오시어 지상의 생명들도 적셔주소서

 

부디 저 세상에서도 당신이 즐기시던

그윽한 묵향과 시향 속에서 큰 평화를 누리소서

천상의 낙원에서 지상에서 못 다한 영원한 복락을 누리소서

 

           -소강의 영전에서 임보 삼가 곡합니다.

   

 

♧ 사랑의 무늬 - 이무원

   -서하일기·19

 

천사가 왔다간 집안 이 곳 저 곳

풀어놓은 별빛

감아놓은 달빛

쓰다만 햇살도 아쉽기만 하네

 

천사가 오는 날을 기다리며

두고 간 별빛을 닦아내고

달빛도 조금씩 풀어내고

햇살도 야곰야곰 덜어 쓰네

 

아 고와 사랑의 무늬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향기는 날개 되어 날아와

맨발로 꽃밭에서 춤을 추네

 

너로 하여 더욱 넓어진 녹색의 초원

파란 하늘 가득한 천상의 음악

소곤소곤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

흘러 가득한 강물을 이루네

 

 

♧ 비 갠 아침 - 이상화

 

밤이 새도록 퍼붓던 그 비도 그치고

동편 하늘이 이제야 불그레하다

기다리는 듯 고요한 이 땅 위로

해는 점잖게 돋아 오른다

 

눈부신 이 땅

아름다운 이 땅

내야 세상이 너무도 밝고 깨끗해서

발을 내밀기가 황송만 하다

 

해는 모든 것에게 젖을 주었나 보다

동무여 보아라

우리의 앞뒤로 있는 모든 것이

햇살의 가닥 가닥을 잡고 빨지 않느냐.

 

이런 기쁨이 또 있으랴

이런 좋은 일이 또 있으랴

이 땅은 사랑 뭉텅이 같구나

아 오늘의 우리 목숨은 복스러워도 보인다.

   

 

♧ 참 시인 - 임보

 

수십 권의 시집을 이미 간행하셨다고요?

참,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문학상을 받으신 바 있다고요?

참, 훌륭하십니다

 

거국적인 큰 문학단체의 장이었다고요?

참, 위대하십니다

 

80이 넘은 문단의 원로 시인이라고요?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참 시인은

작품의 분량이나, 수상의 경력이나

감투의 관록이나, 등단의 이력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가 참 시인인가요?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지사인가요?

세상을 등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인가요?

지사도 은자도 참 시인의 요건은 아닙니다

 

참 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에만 매달린

순진하고 명청한 시쟁이입니다

시를 생각하느라 끼니를 잊기도 하고

시를 엮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하지만

세상이 알아주기를 크게 바라지 않고

세상이 몰라봐도 크게 낙심하지 않는

 

한평생 한 편의 명품을 벼리기 위해

더운 영혼을 쏟는

시의 대장장이

시의 구도자(求道者)입니다

   

 

♧ 스승 - 나석중

 

나무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나의 고독한 그림자가 온 데 간데없고

우리는 서로 날숨을 바꾸어 들이쉬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스미는 볕뉘의 손길이

내 아픈 영혼을 어루만지는데

누군가 산 밖의 소리를 흘리며 뒤따라 왔다

나는 부아가 나서 하마터면 그에게

라디오를 끄시라고 소리칠 뻔하였다

소음을 듣고 진저리를 치던 나무들이

나에게만 넌지시 말해주었다, 조금만 참으라고

참지 못하면 숲이 될 수 없다고

그 때었다, 파리한 골짝물이

흥얼흥얼 산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스승에게 다 배워 더 가르칠 것 없으니

그만

하산하라는 명을 받았다 했다 

 

 

♧ 슬그머니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133

 

슬그머니 내 품으로 기어든 아내

팔베개를 하고 있다

잠시 후

썰물처럼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나이 든 아내의 야윈 몸도

잠시 안고 있으면 따뜻해집니다

아내의 온기로 스르르 잠이 듭니다

젊음이 다 빠져나간

두 개의 몸뚱어리

꿈속에서도

물 위에 떠 있는 부란浮卵처럼

불안, 불안합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막막한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 잠을 깹니다

   

 

♧ DMZ 근처 나무들 - 박명자

 

조심 조심 발꿈치 들고 DMZ 근처로 건너가는 나무들…

밤이 으슥해지자 나무들의 호흡이 점차 빨라진다

60년 침묵의 늪 쪽으로 계속 페달을 밟고 가는 겨울 나무들

모멸의 아픔을 딛고 눈물의 강을 건너…

248km 빈 벌을 가로 질러 가는 나무들

자유의 마을 S 지점까지 첫눈이 오기 전에 닿아야 한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불똥이 설봉아래 호외를 던지고 갈 때

반달가슴곰이 뒤따라 한 마리 외눈 뜨고 지나간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까지 도보로 가다가 보면

낡은 철모 하나 탱탱한 시간 밑에 깜빡깜빡 삭아 내리네

그대 영혼 죽어서도 절규하는 스물한 살

코리아의 새내기 국군장병…

후미진 이 강토 DMZ 억새 숲에

피의 향기 번지어 젊은 혼을 울고 가는 멧새들…

여기는 하늘 아래 이색지대 DMZ

철새들이 100개의 백열등 같은 눈을 뜨고

천상의 운율을 감지하며 꽃가지 아래서

<철새 포럼>을 열고 있나니

사선을 넘어 DMZ 길 떠나는 나무들

그들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 하찮은 것들이 - 임미리

 

나무 둘레의 흙을 동그라미 그리듯 파낸다.

삽을 들어 동그라미 속으로 퇴비를 넣는다.

파낸 흙을 덮어 정성것 다듬고 마무리한다.

소소리바람 살 속을 헤집고 지나가더니

명지바람 먼 산을 넘나들어

오늘은 따스한 햇살을 불러들인다.

나무들 사이에서 풀들과 벌레들

하찮은 것들이 목숨을 맡기고 더불어 산다.

나무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과수원을 지키는 제비꽃과 민들레

삽으로 뒤집고 파내어도 항상 그 자리를 지킨다.

하찮은 것들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표정한 듯 코믹한 근위병처럼

이 봄,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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