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을 보고나서 바로 간 곳은
5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감은사지였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자기가 머물 곳, 지금의 대왕암 자리를 정하고
그 위치를 살펴 섬이 바라다 보이는 곳
용당산을 배경으로 명당에 절을 세워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절을 다 짓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신문왕이 이어 이듬해 절을 완성하고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지금은 가운데 금당터를 사이에 두고
삼층석탑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잘생긴 동서 두 기의 3층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높이 13.4m이다.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같은데,
남아 있는 우리나라 석탑 중 큰 탑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 중석, 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Daum 백과사전’에서)
또 이 절에 얽힌 전설로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가 있다.
‘만파식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전설상의 피리다. 그 설화를 보면
원래의 이름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후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든 피리를 말한다.
신문왕 2년(682년) 5월 초에 해관(海官)이 와서 말하길
동해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왕래한다 하였다.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의 산을 살펴보니,
그 생김새가 거북의 머리와 같고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었다가 밤엔 하나로 합쳐졌다.
신하를 시켜 그 대나무를 베다가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가 하면,
가뭄이 들었다가도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다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진다.
그래서 그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한다.
♧ 문무대왕을 알현(謁見)하다 - 김종제
신라의 위대한 왕을 찾아간다
죽은 후에도 한 치 앞의 나라 걱정에
동해 바닷가 바위에 묻혀
한 마리 용이 되리라 하던
문무대왕을 알현하러 감포로 간다
동서남북 사방이 보이는 바다를
바위로 막아 수중못을 만들고
그 아래 나를 묻으라고
왕이 잠겼다는 바위 밑
맑고 푸른 물속에는
해초도 물고기도 근접하지 않는다
왕비의 넋도 그대 뒤을 따라
하늘을 날아 동해의 한 바위 밑에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저 뭍 가까이 절 하나 지어
금당 뜰 아래 커다란 구멍을 뚫어
용이 된 당신을 드나들게 했다는데
부딪혀 달려오는 밀물과 썰물로
나를 단련시켜 늘 깨어있겠다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약속한
하늘이 내려준 왕이여 임금이여
아, 당신을 알현하러
신(臣)이 서라벌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을 아시는지
내발밑을 흠뻑 적시려고
바위에 부딪혀 오는 세찬 물결의 파도가
만파식적의 피리소리 아닌가
칼을 몰아내고 불을 몰아내고
끊임없이 꽃을 새를 불러내는
만파식적의 피리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