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삼국성지 성도 무후사

김창집 2015. 12. 17. 14:31

* 입구엔 ‘漢昭烈廟(한소열묘)’라는 현판이 걸려있고(위), 앞에 '삼국성지'라는 표지석(아래)

 

* 당비(위)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람들과 이문의  明良千古(명량천고) 현판(아래).

 

■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맑음

 

♧ 삼국성지 성도 무후사

 

  답사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맑은 공기가 쾌적한 날씨다. 이제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안개(스모그)의 도시 청두(成都)로 간다. 도시가 크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어 쾌청한 날이 드물다 한다. 청두는 오래 역사의 고장이고 사천성에 속해 있어 요리가 유명한데, 아직 마파두부나 단단면 같을 것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한번 먹어보자고 벼르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청두에 내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처음 찾은 곳은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侯祠)’였다. ‘무후(武侯)’라고 하면 보통 제갈량을 말한다.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후사(武侯祠)’는 제갈량을 모시는 도교 사당이다. 제갈량의 사당은 딴 곳에도 있지만 여기 쓰촨성 청두시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고 원조격이다. 그런데 이곳은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과 그 임금 유비를 함께 모셨다. 보통 군신을 같이 모시지 않은 것이 관례인데 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 세 분을 모신 곳 입구(위)와 유비 상(아래)

* 관우 상(아래)

 

  가이드를 따라 ‘漢昭烈廟(한소열묘)’라는 현판이 달린 대문으로 들어섰다. ‘삼국지(三國志)’의 주인공 유비현덕과 제갈공명을 모신 곳이다. 어렸을 적에 누구나 읽고 그 후 여러 가지 문헌이나 책에서 거듭 회자되는 인물을 모신 곳이라 감회가 더하다. 위(魏)나라 촉(蜀)나라 오(吳)나라가 활약하던 삼국시대 촉나라 도읍이 바로 이곳 청두(成都)이고, 아직도 유비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유비와 공명의 묘가 합사되어 있는 곳이다.

 

  서진(西晋) 말기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규모가 작았으나 14세기에 이르러 공명의 묘가 합쳐지면서 규모가 커졌다 한다. 그래서 대문의 현판이 원래대로 있고, 요즘은 공명의 시호를 따 무후사로 부르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청나라 때 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꾸며지면서 1961년에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사당 안에는 관우, 장비 등과 함께 촉한 무장들의 상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옆으로 돌면서 삼국지의 묘사대로 상을 만들어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 비의 상(위)과 동화 상(아래)

 

* 등지 상(위)과 진진 상(아래)

 

♧ 당비와 명비, 출사표가 눈길을 끌어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먼저 만난 것은 오른쪽의 당비와 왼쪽의 명비였다. 당비(唐碑)는 공명의 업적을 기리는 비로 809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승상 배도(裵度)가 글을 짓고, 서예가 유공작(柳公綽)이 쓰고, 공예가 노건(魯建)이 조각했는데, 이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다. 그 맞은편에 있는 명비(明碑)는 제갈량의 사당을 지은 내용을 1547년에 조각해 세운 것으로 장시철(張時徹)이 문장을 짓고 고등(高登)이 비석을 세웠다.

 

  이문(二門)에 걸린 현판은 ‘明良千古(명량천고)’로 ‘밝은 어짊이 천년을 간다’란 뜻이다. 다음이 소열전(昭烈殿)으로 유비, 관우, 장비의 상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우리가 소설 등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상상했던 모습이 실물처럼 그 이미지를 살려 만든 상으로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소열(昭烈)은 유비의 시호이다.

 

* 후출사표(위)와 영무문(아래)

 

* 부첨(상(위)과 향총 상, 료화 상(아래)

* 조운 상(아래)

 

  세 분의 상(像) 앞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유비는 현덕이고 하북성 탁주 사람이다. 한나라 말기 의병을 모집하여 천하를 다투었다. 221년 성도에서 황제로 칭하였다. 국호는 한으로 정하였는데 후세에는 촉한이라고 하였다. 오나라를 공격하고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병사하였다.’ ‘관우의 자는 운장이고, 산서성 운성 사람이다. 유비를 따르면서 공훈이 혁혁하고 명성이 자자하였다. 후에 오나라에 사로잡혀 모살 당했다. 시호는 장무후이며, 명나라 때부터 관제로 봉하였다.’ ‘장비는 익덕이고, 하북성 탁주 사람이다. 유비를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당시의 명장이었다. 유비가 오나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부하무관에게 살해당했다. 시호는 환후이다.’

 

  소열전과 무후사 사이에 과청(過廳)이 있었는데, 그 안에 일필휘지로 내갈긴 출사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출사표(出師表)는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이 유비가 죽고 난 후에 출진하면서 다음 임금인 유선(劉禪)에게 적어 올린 글이다. 먼저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가 있기 때문에 나중의 것이라 하여 후출사표라 한다. 당시는 출사표의 내용이 곡절하여 그것을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후출사표도 그에 못지않으나 후세 사람이 윤색했다는 평이 있고 조작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 무후사 입구(위)와 제갈공명 상(아래) 

* 만지면 아이를 얻는다는 희신방 돌(아래)

 

* 유비 상(위)과 장비상(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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