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는 얼레지를 만날 수 없어
늘 얼레지에 목말라 하다가
이번에 제대로 만나게 되었다.
물론 5월초 지리산에 종주 갔을 때는
곳곳에 얼레지가 깔려 있어도
걷느라, 그리고 카메라 렌즈 때문에
찬찬히 즐길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금산 산행에서는
짬짬이 시간을 활용해
마음껏 감상할 수가 있었다.
또한 국립편백휴양림에도
얼레지 군락이 있어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그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라,
이른 봄바람 만난 여인들의
치마폭 안을 들여다 본 셈인가?
♧ 얼레지 - 김승기
길고 긴 겨울을 뚫어내느라
여린 숨결이 얼마나 상했을까
그렇게도 얄상한 목숨줄기로
뼛속에 옹이 박힌 얼음덩이 어떻게 녹여냈을까
하루를 꽃피우기 위해
땅 밑에서 백일을 꿈꾸었는데
아무렴, 얼음의 벽이 두꺼워도
코끝으로 느끼는 봄내를 막지 못하지
봄꽃들이여
티 없이 노랑웃음 저마다 눈이 부셔도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온통 불그죽죽 피멍든 얼굴이어도
오늘의 기쁨을 준 훈장인 걸
무엇이 부끄러울 수 있으랴
이제 봄바람 불었으니
씨를 맺는 작업은 나중의 일
따스한 햇살 받으며 활짝 웃어야지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홍보라
그 맑은 웃음이 황홀하다.
♧ 얼레지 - 김종제
당신, 심산유곡의 몸에서
수줍은 꽃 피었네
산그늘 아래 칠년을 기다렸으니
보라색 문을 열어젖히고
캄캄한 계곡을 보여주었네
어둠 속 저 동굴로
성큼 한 발 내디디면
깊은 못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네
씨앗을 내리는 일이네
열매를 맺고 죽는 일이네
얼레지, 마주 보는 일 없으면
얼레지, 슬픈 사연 없겠지
얼레지, 질투 같은 일도 없겠지
봄 없으면 저 꽃 볼 일 없으련만
오늘도 깊은 산에 올라
당신 만나는 꿈만 꾸고 있네
전령처럼 다가와서
사약 내리고 달아났으니
얼레지, 환장할 봄이 지폈네
얼레지, 빛의 감옥에 갇혔네
얼레지, 살 속에
젖가슴 같은 문신 새겼네
봄 오지 아니하더라도
나, 얼레지 같은 당신에게
몸 쑤욱 들이밀고 싶은데
겨우 다다른 입구에
입산금지라는 글만 걸려있네
♧ 얼레지의 봄날은 간다 - 이정자
저기, 지나가는 여자를 놓고
허리 상학이 발달한 여자,
허리 하학이 발달한 여자, 운운하며
사내 몇 몇이 나른한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렇게라도 시시덕거리지 않으면 봄날은 못 견딜 일인지
제 그림자를 지우며 멀어져가는 벚나무 아래서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제 안에 다 품고 있는 듯한
꽃, 얼레지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꽃이 피면서 여자 치마 뒤집어지 듯 뒤집어진다고
꽃말까지 바람난 여인이라니!
이유 있는 반란이라면 서슴치 않는
요즘 꽃들이 제 아무리 화끈하다하여도
바람은 아무나 나나
얼레지는 피어나는데
무엇 그리 두려워 가시를 드러내며 살고 있는지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요염함을
한껏 꽃대로 밀어 올리며 살아도 좋을
봄날이 속절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 얼레지 - 공석진
바람난 여인은
요염한 자태로
유혹을 하네
얼레 얼레 얼레지
얼굴 벌개진 남정네
다급한 노래로
말을 더듬네
아가 아가 아까씨
선혈이 낭자한
자주빛 사랑은
절벽 바위틈에도
숨이 넘어가도록
비명이다
♧ 얼레지꽃 - 최원정
봄 햇살이
단단하게 수직으로 꽂히는
호젓한 산길
앉은뱅이 양지꽃
봄볕 바라기로
노곤 노곤해 질 때
보랏빛 쓰개치마 곱게 쓴
얼레지 두 송이
살포시 고개 떨구고
그리움으로 애끓는 마음
짐짓, 옹송그려 보지만
파랗게 날이 선
따가운 봄 햇살에
그만, 더운 심장까지
데이고 말았다
♧ 얼레지 - 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 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 얼레지꽃 - 김내식
얼레 얼레 얼레레!
눈발이 날리는데
벌써 봄인 줄
알았나봐
칼바람 부는 깊은 산골
지리산 천왕봉아래 빨치산 비트처럼
그 호된 시련을 견디려고
부엽이불 덮고서
깊이 잠들어
깊은 잠 새벽꿈에
쏘아오는 봄 햇살을 집중포화로
화들짝 놀라
깨어나구나,
이제는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어
편안히 쉬시기를
그대 얼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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