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대가야를 찾아서

김창집 2018. 9. 20. 15:12

                                                                                  *대가야의 상징 '금동관'

                                                                     *역사관 입구 '그릇과 그릇받침' 토기

                                                                        *낙동강 서쪽에 자리한 대가야 땅

2018911일 화요일 오후 3



 김해의 가야 유적은 여러 번 찾아보았지마는 고령의 대가야 유적은 처음이라 들뜬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을 기슭에 대가야역사관, 대가야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이 있어 대가야를 한꺼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먼저 대가야역사관으로 향했다. 앞 화단에서 천사의나팔꽃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역사관 앞에 상징적으로 만들어 세운 대가야그릇받침에 단정하게 올려놓은 토기가 눈길을 끈다. 처음 대하는 유물들이라 설명할 자신이 없어 해설사분께 요청을 하고 천천히 유물을 돌아보았다

 

  대가야역사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졌는데, 상설전시실은 대가야 및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문화와 역사에 대한 설명문과 유물을 전시해 놓았고, 기획전시실은 연간 1~2회 정도 특정주제를 설정하여 기획전을 개최한다고 하나 마침 바꾸어 설치하는 기간이어서 들를 수 없었다.



상시전시실을 보면서

 

  상설전시실의 첫 번째 파트는 대가야의 여명이었다. 고령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3만년전 구석기시대부터이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무덤(支石墓), 선돌(立石), 바위그림(岩刻畵) 등 많은 선사유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뜬금없는 바위그림이 있어 옆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니, ‘대가야 사람들은 조상들의 숭배했던 바위그림을 훼손했다는 내용으로 1994년 대가야왕릉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그 터를 발굴 조사할 때 대가야시대 무덤에서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이 나온 사연을 적어놓았다.

 

 두 번째 파트는 대가야의 성립으로 대가야는 하늘신 이비가와 가야산신 정견모주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 건국신화를 전시하고, 유물들을 전시했다.

 

 세 번째 파트는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이다. ‘대가야는 주변의 철광산을 개발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어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군대의 힘을 키웠다. 백제, ,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그에 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하였다.


  네 번째 파트는 대가야 이후의 고령으로, 562년 신라에 병합되면서 대가야군으로 이름이 변동되었고,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변동내용과 당시의 유적과 유물을 전시했다.


                                                                            *전시실 - 철을 다루는 모습

                                                                  *말 모형과 투구와 갑옷을 입힌 모습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 건국신화

                                                                            *전시실에 전시된 토기들


들어가지 못한 대가야왕릉전시관

 

  고분군으로 가는 길 초입에 도자기 파편으로 쌓은 백자탑과 분청사탑이 나란히 서 있고 앞으로 기와탑을 세울 것이라 했다. 다음 왼쪽으로는 건국기인 서기42년부터 562년 신라에 항복하기까지의 대가야 연표, 고분에서 나온 유물 사진, 다음으로 발굴했던 45호분(1977), 44(1977), 30호분(1994), 32~35호분(1978), 75호분(2007), 73호분(2007), 518호분(2012)의 사진이 간단한 설명과 곁들여 게시판 형태로 세워놓았다.


  고분으로 가는 길에 세운 왕릉전시관은 마침 정비 중이라 해설사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부지 10,839(3,278)에 마련한 전시관은 특별히 직경 37m, 높이 15.47m의 왕릉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고분군 제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한 것이다. 관람객들이 실물크기로 만든 모형 44호분 속에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전시관은 일반인들도 보다 쉽고 생생하게 대가야인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립했다. 대가야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학술연구와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주변의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한 문화재와 연계하여 문화유적 관광지를 조성한다는 목적도 물론 가지고 있다.

 

 왕릉전시관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순장 풍습 등에 관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이자 종합 전시관이라 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백자탑과 분청사탑

                                                                *왕릉전시관 가는 길 

                                                    *왕릉전시관 앞에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왕릉전시관의 모델인 지산동고분군 제44호분 발굴 모습


 

지산동고분군 답사

 

  아쉬운 마음을 접고 고분군으로 향한다. ‘고분가얏길이라 쓰인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은 고분답사와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로 활용하는 것 같다. 넓고 공기 맑은 곳, 적당히 오르내릴 수 있는 코스에서 역사의 내음을 맡으며 산책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사적 제79호 지산리 고분군은 고령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고령의 진산인 주산의 남동쪽 능선과 가지능선을 따라 줄지어 축조된 대형분과 경사면에 축조된 중소형분 등 700여기가 밀집 분포하는 가야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군이다.

 

 주산 정상부에는 대가야시대의 석축산성인 주산성(사적 제61), 동쪽 기슭에는 대가야궁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이 분포하는 핵심 고분군이 분명하다.


 1977년 지산리 44호분과 45호분을 시작으로 봉토분 10기와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로 고분군의 성격이 일부 밝혀져 대가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산리 44호분은 으뜸돌방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딸린 돌방과 그 둘레에 32개의 순장덧널이 배치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최대 규모의 순장무덤이며, 45호분에서도 11개의 순장덧널이 확인되어 순장문화를 실증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관과 금동관 장식품, 금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 무기류, 마구류, 토기류 등 소위 고령 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대가야 문화의 우수성과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지 게시판에서)

    


일제 때 도굴로 수난의 상처를 안은 고분들

  

 오르는 도중에 언뜻 대가야 통문이 비치고 나서 해설판을 만났다. 대가야 통문은 일제강점기 단절된 지산동 고분군의 지맥을 잇는 사업으로 대가야 고령의 옛 정기를 회복하고, 고분을 찾는 답사객들의 편의와 안전을 도모함은 물론 동물이동로를 확보하여 생태계 파괴를 최소화 하고자 추진해 200311월부터 200412월까지 파형강판공법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가 잘라버린 김해 구지봉의 지맥을 연결한 구지터널처럼 뜻 있고 멋져 보인다.

 

 지금은 연차적으로 여러 차례 복원해놓아 무덤들이 번듯번듯하게 보이지만 이 중에는 일제와 그 하수인들의 도굴로 처참한 몰골을 보이던 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증거를 찾으려고 가야시대 고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쳤으며, 이후 왕릉급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면서도 보고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후에도 외진 곳에 위치한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큰 무덤엔 굴이 1~2개씩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규모가 크다 보니 도굴꾼들이 새로 뚫지 않고 이미 나 있는 굴로 계속 드나들며 무덤을 도굴했고, 결국 왕이 안치되었던 주곽(主槨)과 왕의 유품, 부곽(副槨)은 모두 도굴되었다. (나무 위키 참조)

 

 지금 이곳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등 7개소의 가야고분군은 202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우리 답사단은 이곳을 시작으로 김해 대성동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둘러볼 예정이다. 아침에 항공 시간이 늦어 우륵박물관은 다음으로 미루고 고분군 답사를 마쳤다. 즐겁게 설명을 해주신 해설사 두 분께 감사드리며 목표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빈다. 


 

가야의 새 - 신용선

 

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싶은 나라, 땅 속

어딘가에 여태도 백성들이 숨어살 것 같은

가야의

일부가 출토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잠든 사람을 옆에 두었을 때처럼 숨을 죽이며

박물관을 돌다가

미늘쇠에 앉아 있는

쇠붙이로 만든 가야의 새들을 보았다.

 

날개를 가진 것들이 앉아 있으면

답답하다.

 

누구든 발을 굴러 깨우고 말겠지. 가야의 새들이

깨어나면

그들이 떠다니는 하늘만한 땅이

다시 가야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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