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이웃을 돌아보는 추석

김창집 2019. 9. 12. 17:41


무덥던 여름이 끝나는 시점이지만

비가 오다가 태풍이 지나가는 사이

어김없이 추석날은 찾아왔다.

 

올해는 유난히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트집 잡고 서로 꼬투리를 캐어 끌어내리려고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게 굴던 살벌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이상한 명절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올 추석은 우리가

바쁘다고, 아니면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다른 사람들이야 죽이 되든 말든

외면하며 살진 않았는지

조용히 되새겨보며,

이웃을 보살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추석 - 정군수


고향집 우물가에는

지금도 놋대야에 달이 뜨고 있으리

 

흰 고무신 백설같이 닦아내던 누이

손끝 고운 그리움도 남아 있으리

 

눈엔 듯 보이는 듯 뒤안을 서성이면

장독대에는 달빛 푸른 새금파리

눈에 비친 어머니 안쓰러움도

오늘밤엔 기다림으로 남아 있으리

 

굴렁쇠 안에 뜨는 둥근 보름달

고샅길 이슬 맞고 달려 오며는

 

달빛 받아 피어나는 할아버지의 수염

박꽃 같은 웃음도 남아 있으리     


 

 

추석달 -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추석 - 엄원용 

                         

꼭 제사를 지내야만 추석이더냐

퍼내도 퍼내도 부족함이 없는 저 밝은 달을 그릇마다 담아

형님 아우님 만나는 기쁨을 상마다 푸짐하게 차려놓고,

아들 손자며느리 한 자리에 모여앉아

조상님 고마운 생각에, 대신 살아계신 부모님 정성껏 모시고

올해도 잘 익은 과일들처럼 자식들

무럭무럭 자라게 하시고, 향기 품어내게 하시고

우리 집 잘되고, 이웃이 잘되고, 이 나라 잘되라고 빌고 빌면,

그제야 오늘이 진정 추석날이지    


 

 

추석달을 보며 -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추석 -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 추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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