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의 계절

김창집 2019. 11. 27. 12:36


꽃잔 건배

 

가을엔

한가을엔

꽃들도 건배를 하네

 

들바람 건배사로

꽃잔을

부딪치네

 

쟁그랑

햇살이 넘쳐

아물아물

내가 취하네

    

 

 

가을 끝이 보인다

 

이따금 바스락

이따금 살그랑

느티나무 그늘에 가을이 깊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뭇머뭇

구름 몇 점

 

손가락 튕겨본다 끄덕하지 않는다

입바람 불어본다 요동하지 않는다

바람이 건듯 불더니 단풍잎 우수수 진다

땅과 하늘 사이

사람과 나무 사이

온갖 색소 풀려 있다

소리가 풀려 있다

 

낙엽이 소리를 끌어

가을 끝이 보인다

    

 

 

꽃의 변주

 

1

왜 그리 부산떨지

풀잎 흔드는

아지랑이……

누군가 한 움큼 꺾어 마른 꽃이 될지언정

내 분첩 단박 터뜨려

이 봄을

물들일까 봐

 

2

여름 땡볕에는 왠지 짐승이고 싶다

사향낭 몸에 품고

이저리 누비다가

선 굵은

나의 등짝에

줄무늬를 넣을까 봐

 

3

설령 향기 없대도 단풍 숲은 꽃밭이다

물이 들면 드는 대로

마르면 마른 대로

가을엔

그냥 매달려도

종소리가 새나온다

 

4

혹한을 참느라 볼이 발간 건 아니다

눈 속을 비집고 나와

주위를 살펴보면

저마다

얼음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    


                                                               *사진 : '여행등산야생화사진' 카페에서

목신의 가을

 

꽃인가

아니다

 

나무인가

아니다

 

사람인가

아니다

 

부처인가

글쎄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년 살아 신이 됐다

 

의상대사의 지팡인가

아마 그럴 법도

 

마의태자가 심었나

아마 그럴지도

 

용문산 가을 산빛을 늠연히 지키고 섰는

 

내방객은 대웅전보다 은행나무를 먼저 본다

하늘인지 땅인지 경계 없는 저 품새

나무도 이 경지에선

목신이 될밖에,

본디 신이란

하는 일이 없다지만

사하촌 사람들은 절을 업고 살아간다

그 절집

대웅전 오르는

은행나무 노란 하늘

 

목신도 가을에는 휴식하고 싶을 게다

황금빛 법의 같은 이파리들 떨어내며

이골 난 세속 바람에 끄덕 끄덕 목례만 한다

    

 

꽃들의 노동

 

꽃을 피운다는 건

꽃들에겐 노동이다

 

물양귀비 꽃잎 오므려

분꽃은 꽃잎 펴고

 

주야간 교대 근무하는

봉제공장 누이들 같다

 

꽃들이 한철이듯

인생도 그러겠지

 

폭염 속 소나기든

끈질긴 이명이든

 

어금니 앙다물다가

그냥 흘린 울음이다

    

 

 

철새에게 배운다

 

드높은 가을 하늘 채운이 걸리던 날

한 무리 철새들이 편대 지어 날아왔다

찬바람 불어오느니

섬에 뜬 깃털 몇 점

 

철새들 여행이란 극한의 생존이다

따스한 가슴에 대물린 날개 하나

다 저문 서녘 하늘에

끝물의 단풍 같은

 

바닷가 습지는 왁자지껄 난장이다

변경의 난민인 듯 무국적 집시인 듯

섬살이 부대낀대도

안부를 묻곤 한다

 

새들은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으니

올 때의 몸과 마음, 떠날 때 가볍다고

가벼워 더 넓은 세상

내게도 일러준다

    

 

 

가창오리 겨울나기

 

새들에게 언어 있을까 곰곰 생각하다

금강하류에 가 오래도록 귀를 연다

다문화 물새의 축전

겨울나기 한창이다

 

때마침 노을이 내려 개막쇼가 열리고

십수만 가창오리 일제히 날아올라

한순간 회오리 뜨듯

노을 화판 저 군무

 

마음 비워 가벼운지 떠오르고 내리고

감았다 풀었다 내 맘도 갸우뚱한다

해묵은 체증의 더께

시나브로 갈앉는다

 

새들은 저문 강에 시린 발을 담그느니

깨어 있어 다순 게 강물이 아니더냐

느릿한 충청도 말로

물갈퀴를 간질인다

 

 

                   * 홍성운 시조집버릴까(푸른사상,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