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오영호 시조시집 '연동리 사설'

김창집 2019. 12. 14. 12:15


시인의 말

 

내 고향 제주시 연동도 무자년

4·3의 광풍에 초토화됐다

형님을 비롯해 희생된 106,

오늘도 그 원혼들이 한라산을 떠돌고 있다.

그래서 깨어 있기 위하여

해와 달 별빛으로

허공에 서정의 집 한 채 지어

늘 신원의 등을 밝혀놓고

43의 정명正名을 찾는

그날까지 노래하고 싶다

 

                                               오영호

    

 

 

월령리 바닷가에서

 

정월 대보름날 썰물 때가 되자

바지를 걷어 올린 월령리* 바닷가엔

고동과 소라 해초들이 숨바꼭질 한창이다

 

지난 폭설에도 이겨낸 손바닥 선인장

붉은 가시에 찔린 바람 타고 윙윙대는

바다 위 풍력발전기 밤잠마저 설쳤나 보다

 

바다는 에메랄드빛 바닥까지 환한 수심

서로를 배려하듯 아무런 다툼도 없이

오가는 물고기들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시간이 멈춘 자리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때 낀 일상들이 시나브로 씻겨나가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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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마을

    

 

 

폭설

 

슬프고 부끄러운 일

 

누군들 없겠냐만

 

눈 펑펑 내리는 날엔

 

샅샅이 끄집어내어

 

다시는

 

돋아나지 않도록

 

깊이깊이 덮고 싶다

    

  

단풍과 노부부

 

곱게 단풍이 든

 

감나무 앞에 선 노부부

 

할멈,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지요?

 

참으로 곱게 물들었네요

 

우리도 그렇지요?

    

 

 

홍매

 

뜨겁게

뭣 모르고 달아오른

사춘기처럼

 

그 마음

시샘이나 하듯

몰아치는 꽃샘추위

 

입술을

오므렸다 피는

홍매화 두어 송이

    

 

 

우묵사스레피

 

하도리* 바닷바람에 삐딱하게 누워버린

너를 볼 때마다 도지는 섬의 아픔

수평선 그 너머 꿈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그때처럼 눈귀 막고 순응하며 살다가도

내 허리 딱 한 번만이라도

쭉 펴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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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구좌읍 바닷가 마을

    

 

 

명상하는 먹돌*

 

어찌 멍들지 않고 살 수 있겠냐고

 

마모된 방랑의 길 촘촘히 새겨보듯

 

바닷가 퍼질러 앉아 반짝이는 먹빛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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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끈하고 둥근 까만 돌

    

 

 

수선화

 

  사라봉 오르는 길 폭설과 찬바람에도 올곧게 밀어올린 너의 꽃향기에 가던 길 멈추어 서서 흐린 눈과 귀를 씻었더니


  나도 모르게 파란 풍선을 타고 사라봉 등대를 지나 관덕정 광장을 돌 때 지금껏 내가 팔아버린 양심들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더니, 목관아 형틀에 묶여 엉덩이가 터지도록 한없는 곤장질에 초주검이 되었지만 죗값을 치른 것 가타 마음 훨씬 가볍더라

 

  등 하나 밝혀놓은 늦은 참회의 방

  황무지 개간開墾하듯 썩은 뿌리 뽑아내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너를 가득 심고 싶다

 

 

         *오영호 시조시집 연동리 사설(다층현대시조시인선003,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