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항신 시집 '꽃향유'에서

김창집 2019. 12. 23. 23:42


가을의 향기

   -용눈이오름

 

용의 등을 밟고 걸어간다

야자수 매트가 곡선 따라 이어지고

등허리에 듬성듬성 돋은 비늘처럼

억새들이

늦가을 칼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있다

포근하게 엎드린 능선 따라

물매화 쑥부쟁이 꽃향유*가 피어있다

꽃향유

다만 보랏빛 입술로 유혹한다고

나는 막연한 오해를 했었다

그러나

여린 살을 슬쩍 어루만지는 순간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너의 냄새

너는 가을의 향기를 몸속에 품고 있었다

늦가을 물기 마른 햇살 아래

가을의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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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유 꽃말 - 가을의 향기

  


하회 마을에 가다

 

수령 600여 년 된 당산목이 굽어보는

하회 마을에 발자취를 남긴다

 

씨 집성촌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태백산 줄기가 만들어낸 낮은 구릉지

에스라인으로 제대로 휘어진 낙동강이

가을바람에 리듬을 맞춘다

골목마다 담장 높은 집들이 이름을 달고 있다

ㅇㅇ고택, ㅇㅇ고택

용마루를 따라 수키와 암키와가

내림마루로 이어진 지붕

무심코 들어선 마당 넓은 집에서

수막새와 암키와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댓돌 아래 내려선다

 

빈 행랑채에 환영인 듯

아버지 맥없이 앉아 계신다

 

친척집 마당 끄트머리에 잠시 얹혀 지내던 아버지

 

이미 귀밑에 흰서리를 들이셨었지

안집의 부엌과 텃밭을 종종걸음으로

어머니는 하루해가 짧다고 하셨지

 

지금은 종갓집 며느리 손을 넘어

남의 손에 달린 집

 

내 마음 한구석에 오롯이 남아

때로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흙벽에 기댄 아버지의 흑백사진 같은

 

하회마을 그곳에 발자국을 남긴다

    

 

사은별곡

   -정군칠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만나기 전에 저는 너무나 과문했습니다

3년 가까이 낮에는 시앗에서 밤에는 201호 강의실에서

우리들과 함께 부대끼던 날들

문학기행 간 안동 집성촌에서 시 한 수 건지고

부여에서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부르면서

회룡포에서 그리고 옛 상인들이 오가던 나들목 강가

 

주막에서 기행 흔적 남기며 언제는 도두 카페 야외수업

 

언제는 삼화포구 야외수업하면서 우리들을 키워내신

눈이 커서 슬픈 짐승처럼

때론 외로움이 때론 냉랭한 그 안에 인자함이 자리한

임이셨고 사람이셨습니다

 

그냥 언제까지 마냥 함께 할 수 있는 언제든지 뵐 수 있는

임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홀연히 황망하게 광명사로 가셨지요

 

생생한 숙제 열 번 쓰고 닳도록 쓰라고 문자를 하시고는

언제나 곁에 있을 것처럼 하시고는

 

임은 가셨지만 보내지 못한 마음은 늘 곁에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 김항신 시집 꽃향유(책과나무,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