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2월호와 흰애기동백

김창집 2019. 12. 3. 23:34


땀에 절은 그 속이 김순일

 

서산용현리마애삼존상 앞에서 빈다

 

부처님!

미소 좀 떼어 먹게 하여 주십시오

 

물끄러미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집에 돌아가 거울 앞에 서서

네 얼굴이 다 닳을 때까지

들여다보라고 하신다

 

30분을 버티지 못하고

거울을 집어던진

나는

땟국물 흐르는 서산 장터로 나가

시장바닥 사람들의 얼굴 속으로 들어갔다

 

땀에 절은 그 속이

따뜻하게 웃으며 반겼다

    

 

 

추석 전날 우목리 권순자

 

물이 말을 따라왔다

그물로 덫을 놓으면 달이 끌려나왔다

배고픈 달이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돌이 구르는 소리에 귀를 열었다

소리들은 저들끼리 출렁거렸다

물결의 꼬리는 하도 길어서 밤새 달려도

꼬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까만 고양이 골목길에 웅크리고 밤을 기다렸다

까만 물결은 밤새

물고기들의 등을 어루만지고 모래들을 뱉어냈다

말은 텁텁하고 단단하거나 질기고 날카로웠다

달이 건너는 바다는

모닥불 이어지는 해변에서 맴돌았다

    

 

 

꽃의 전령 - 이화인

 

한파가 몰려온다는 기별에

눈발이 듬성듬성 치더니 이내 폭설이 내렸다

인해전술로 온 세상을 점령해 버렸다

 

겁도 없이

작은 뱁새 한 마리가

개선장군처럼 눈 속을 뚫고 날아왔다

 

-꽃들이 가까이 왔어요.

    

 

 

초겨울 일기 홍인우

 

구절초 꽃밭 만들어준 당신에게

매양 나는 새벽 찬 서리 같았지

 

사시사철 내리는 서릿발에

낙담으로 채워진 낮과

허전함에 등 시린 당신의 밤이 거듭 되었으리

 

그해 겨울

계절 넘긴 꽃처럼 당신 홀연히 떠나니

소문은 햇빛 아래 이삿짐처럼 구차히 떠돌고

당신의 골목은 순식간에 망망히 넓어지더라

 

12월이면

홀로 별이 된 당신

옅게 밝히는 새벽마다

선잠 끝 가슴을 찔리는 나는

너무 늦게 당신의 안부를 묻곤 한다

    

 

 

우기다 김혜경

 

시라고 우기며 쓰고

시라고 우기며 책으로 엮는다

 

누구는 멋지다고 하고

누구는 심오하다고 했다

 

손자 놈이 들어와선

낱장으로 뜯어 딱지를 접는다

 

최고란다

빳빳해서

    

 

 

시인의 편지 洪海里

 

산만刪蔓하옵고,

일백오십 편의 시로 시집 한 권 엮었습니다

정가, 거금 15,000원정

편당 가격 일백 원

박리다매薄利多賣로 내놓아도

팔리기는커녕

파리만 날리고 있는

먹지 못하는 밥이 되어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결국,

나는 일백 원짜리도 못 되는 시인임을 시인합니다

가슴으로 보고 발로 쓰는 시를 위하여

산말을 잡아 방목을 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풀밭에 나가 딱따깨비 메뚜기 방아깨비 베짱이

철써기 풀무치 여치 귀뚜라미와 친구할까 봅니다

그 애들이 불러주는 노래나 필사하면서

풀꽃과 놀다 보면

팔도에 솥 걸어 놓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에게 파리 발 드리는 일은 없겠습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또 문안드리겠습니다.

 

  2015년 한여름날

  북한산 우이동 골짜기에서,

  洪海里 배상.

    

 

 

수평선 - 차영호

   - 복사꽃

 

  도로를 내로 바꾸고

  차는 쪽배로 바꾸면

  흐르고 흘러 닿을 수 있을까

 

  무릉武陵

 

  복사꽃 붉게 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젓대를 불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무릎을 베고 눕는 수평선

 

  설익은 음률에도 바다는 파도를 파견하여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로

  보구치 복복

  성대는 분홍, 꽃분홍

 

  복사꽃 풀풀 풀 흩어질 때

  자꾸 뒤돌아보며 작별하는 어깨 너머

  화개花開를 기약할 까닭들이 차곡차곡 쟁여진 고리짝이 있어……

 

  내는 다시 도로로 바꾸고

  쪽배를 차로 바꿔

  밟아, 밟고 또 쌔려 밟으면 세월을 추월하여 먼저 닿을 수 있을까, 내년도, 후년도, 내후년도치

 

  도원桃源

    

 

 

나무의 기억 - 남정화

 

나무는 몸에 새겨놓았다

가장 강력한 충격을

그는 빅뱅을 전해 들었고

최초의 생물이 출현하는 걸 목격했다

짚신벌레와 고비식물, 선캄브리아를 몸속에 저장해두었다

대대로 나무의 유전자는 그것을 몸 속 깊숙이 옹이로 박아놓은 채

태연하게 참선하고 있다

나는 오늘에야 그걸 알고

나무에게 절하는 것이다

나무라는 절 한 채

그 무수한 미황사에게

 

 

                      * : 月刊우리(201912378)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흰애기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