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는 해
눈과 귀 보고 들음이 세포까지 물들어
다음 생에 걷는 길 다시 재는 그림자
서산에
남겨진 여운
빛
그들, 그 빛이
♧ 억새
흰머리 정년에
사랑이나 남을까
산비탈 낮은 흐름
바람의 신호만으로
흔들림 두고 가야 할
그 시간에 하얗게
♧ 여로
잎 피고 떨궈내는
시간 밖의 안녕을
한번쯤 확인하고
낟가리로 익던 가을
미련만 꾹 눌러 재워
묻는 안부, 누구인가
♧ 꿈
살아있는 흔적을
혼자서 되짚는 거야
잡초처럼
끝도 없이
살아갈 저 길 끝
깊은 밤 촉수를 세워
빛의 언어 주는 거야
♧ 주름살
살다보니 생기더라
살아오며 만든 거라
밭도랑 이랑 만나
골 하나에 넣은 씨앗
치솟다 지친 어느 날
별지에 내가 있다
♧ 치매
잎맥만 선명하다 우글쭈글 저 낙엽
누렇게 바랜 잎이
길거리에 남긴 숨결
바람이
쓸고 간 자리
듣는다 보듬는다
♧ 꽃은
어머니 주검을 들여다보다
꽃물보다
더 진하고 아득한 만남을
기
억
했
다
하나의 꽃으로 피어
마른 꽃 되기까지
나뭇잎 떨어져
여기저기 떨군 가을
꽃은
지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고
어머니
꽃술에 새긴
붉디붉은 꽃의 언어
♧ 불이문*
면과 면이 만나면
하나의 각을 이루지
각 안의 작은 틈
애초의 모서리로
서로가 서툴게 바라 본
간극들이
거기 있어
틈 안의 소리는
벽을 타고 오르지
동강 난 눈물이나
일직으로 박힌 시간
기억의 전원을 누르면
거기가 거기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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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임을 상징하는 불교 용어.
** 송두영 시집 『물메 쉼표 같은』(열린시학 정형시집 15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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