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내 고향 제주시 연동도 무자년
4·3의 광풍에 초토화됐다
형님을 비롯해 희생된 106명,
오늘도 그 원혼들이 한라산을 떠돌고 있다.
그래서 깨어 있기 위하여
해와 달 별빛으로
허공에 서정의 집 한 채 지어
늘 신원의 등을 밝혀놓고
4․3의 정명正名을 찾는
그날까지 노래하고 싶다
오영호
♧ 월령리 바닷가에서
정월 대보름날 썰물 때가 되자
바지를 걷어 올린 월령리* 바닷가엔
고동과 소라 해초들이 숨바꼭질 한창이다
지난 폭설에도 이겨낸 손바닥 선인장
붉은 가시에 찔린 바람 타고 윙윙대는
바다 위 풍력발전기 밤잠마저 설쳤나 보다
바다는 에메랄드빛 바닥까지 환한 수심
서로를 배려하듯 아무런 다툼도 없이
오가는 물고기들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시간이 멈춘 자리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때 낀 일상들이 시나브로 씻겨나가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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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마을
♧ 폭설
슬프고 부끄러운 일
누군들 없겠냐만
눈 펑펑 내리는 날엔
샅샅이 끄집어내어
다시는
돋아나지 않도록
깊이깊이 덮고 싶다
♧ 단풍과 노부부
곱게 단풍이 든
감나무 앞에 선 노부부
할멈,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지요?
참으로 곱게 물들었네요
우리도 그렇지요?
♧ 홍매
뜨겁게
뭣 모르고 달아오른
사춘기처럼
그 마음
시샘이나 하듯
몰아치는 꽃샘추위
입술을
오므렸다 피는
홍매화 두어 송이
♧ 우묵사스레피
하도리* 바닷바람에 삐딱하게 누워버린
너를 볼 때마다 도지는 섬의 아픔
수평선 그 너머 꿈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그때처럼 눈귀 막고 순응하며 살다가도
내 허리 딱 한 번만이라도
쭉 펴고 살고 싶다
---
*제주시 구좌읍 바닷가 마을
♧ 명상하는 먹돌*
어찌 멍들지 않고 살 수 있겠냐고
마모된 방랑의 길 촘촘히 새겨보듯
바닷가 퍼질러 앉아 반짝이는 먹빛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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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끈하고 둥근 까만 돌
♧ 수선화
사라봉 오르는 길 폭설과 찬바람에도 올곧게 밀어올린 너의 꽃향기에 가던 길 멈추어 서서 흐린 눈과 귀를 씻었더니
나도 모르게 파란 풍선을 타고 사라봉 등대를 지나 관덕정 광장을 돌 때 지금껏 내가 팔아버린 양심들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더니, 목관아 형틀에 묶여 엉덩이가 터지도록 한없는 곤장질에 초주검이 되었지만 죗값을 치른 것 가타 마음 훨씬 가볍더라
등 하나 밝혀놓은 늦은 참회의 방
황무지 개간開墾하듯 썩은 뿌리 뽑아내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너를 가득 심고 싶다
*오영호 시조시집 『연동리 사설』 (다층현대시조시인선003,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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