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월호의 시와 수선화

김창집 2020. 1. 7. 11:41


출마설 김석규

 

이제 고마해라 마이 해 무우따 아이가!


    

 

 

단풍잎 호수Maple Lake* - 김영호

 

사랑 하고 싶네

저 성결한 얼굴의 호수 앞에선.

벌레도 사랑할 수 있겠네.

돌도 사랑할 수 있겠네.

짐승도 사랑할 수 있겠네.

원수도 잊을 수 있겠네.

 

내 운명도 사랑할 수 있겠네.

 

우주와 사랑할 수 있겠네.

 

운명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네

슬픔과 눈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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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북쪽 캐스케이드산맥의 한 호수.(201982일 등정)

    

 

 

느티가 기다리고 있더군 나병춘

 

오백 년 느티낭구가

먼 손차양하고서

여행에 지친 발자국 소릴

기다리고 있더군

 

그 아래

 

사마귀를 기르면서

빈 의자 몇 놔두고

쉬었다 가라고 하더군

산만해진 사마귀가 텃세하면서

나를 밀어낼 동안

햇살은 환장하게 쩌르렁 쏟아내면서

도끼다듬이를 더욱 빛나게

다듬고 있더군

 

그래서 어쩌자고?

적의의 발톱 바짝 세워들고서

    

 

 

경자년 아침에 이규흥

 

동해의 이마 위로

솟아오르는 해

그 햇살에 눈 맞추며

마음을 씻는다

 

옳음과 외로움이

빈자리를 요구할 때

 

안타까운 마음

가련한 마음이

텅 빈 자리를 요구할 때

 

, 비워 주리라

저 찬란한 햇살

세상을 향해 훨훨 타오르도록

    

 

 

녹차꽃 핀 날 임미리

 

녹차꽃처럼 하얗게 웃고 있었네

옹이 진 솔낭구 아래서

한쪽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그는 느리게 내 이름을 불렀네.

구겨진 신발을 고쳐 신으며

허리를 펴고 그를 보았네.

햇살이 갓 피어나고 있었네.

어디 가느냐고 묻는 물음 사이로

먼 눈빛이 허공을 가르고

녹차꽃은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네.

그의 지팡이가 눈에 들어와

가슴속에 아픈 자리를 잡았네.

차마 등산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네.

잠깐 절에 좀 다녀오려고,

수습하는 대답은 말이 되지 못하고

머쓱해진 마음만 꽃처럼 피어났네.

아직은 찻잎처럼 푸르러야 할 나이인데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황급히 녹차꽃을 향해 웃었네.

추억처럼 이 꽃도 곧 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모른 척 하얗게 웃으며

꽃잎처럼 향기만 휘날리기로 했네.

    

 

 

고양이 남정화

 

네 울음은 어리고

그러나 네 울음은 서럽지 않다

태중에서 죽은 영혼이 갈아입은 윤회의 옷인가

그러나 네 울음은 아프지 않고 앙칼지다

오히려 다행이다

서러우면 나도 서러운 걸

차라리 너는 섬뜩하다

한밤중에 네 소리를 듣는다

태중 아가의 부름인가

너는 언제나 맑고 높은 소리로 울어준다

    

 

 

과녁 민구식

 

우산을 쓰고

구름다리 위에 쪼그리고 앚았다

허술한 나를 통과한 화살촉

동심원 가운데 꽂히며

명중이요하고는 사라진다

거부를 겹겹이 쌓은 삶이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심장이다

 

수면이 주름을 펼치면

하늘이 다 들어가고

바람도 깊게 들고

닫은 속 활짝 여는데

수면만 보고 맘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

 

숱한 중심을 헤며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집

저녁이 되니

두꺼운 나이테 얇아져 간다    


 

의 집에서 - 김혜천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몬테베키오

베아트리체를 기다리며 수없이 망설이던 곳

그 다리 초입의 거푸집을 지었다

 

허공의 집

바람의 집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을 잃었다

길은 길 따라 끝이 없고

따라오는 길을 자꾸만 지우는 안개

저 다리를 건너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강물이 강을 버려 바다에 닿듯

나는 무엇을 버려 네게 닿을까

 

바람이 몸을 풀어 강물을 깨우고

수초가 흔들리다 달의 그림자로 눕는 곳

연잎의 물방울이 흘러 물알을 깨고

물의 신들이 춤을 추는 곳

이곳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신곡 한 편 얻을 수 있다면

휑한 거푸집에 남아 스러져도 좋겠다

      

                        * 월간우리20201월호(통권 37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