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월호의 시와 제주수선화

김창집 2020. 1. 14. 00:18

 

성안聖眼 - 김영호

 

나무는 나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나의 귀를 통해서 중생의 신음을 듣고

나의 손을 통해서 사람들 상처를 만지네

 

나무의 눈을 통해서 내가 우주를 보고

나무의 귀를 통해서 만유의 신음을 듣고

나무의 손으로 내가 사람들 상처를 만지네.

 

인자人子가 나의 시로 세상을 보고

나의 시로 중생의 상처를 만지며

나 인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자의 귀로 중생의 신음을 들으며

인자의 손으로 아픈 자 상처를 만지네.

나 인자의 가슴으로 시를 쓰네.

    

 

 

단풍의 배후 나병춘

 

다만 어깨의 자세만으로

할 말 다하는 배우가 있다

 

바람의 빛깔로 춤추고

햇살의 그림자놀이로 말하는

 

아무도 모르는

텅 빈 길바닥 노래가 있다

 

다가올 배고픔도 허허실실 반기는

뒷골목 남사당 패거리들

    

 

 

겨울나기 도경희

 

뿌리와 속잎 위해

언 손 호호 불며

무서리 받아낸 가스라진 잎

한사코 지표를 거머쥐고 있다

 

무슨 까닭 있어

오래된 성채처럼 반쯤 어그러진 담 넘어

한 살이를 시작했을까

씨를 가지기 위해 땅에 납작 붙어 있는

저 그지없는 연민 앞에

 

또 폭설이 내리는지

온몸의 멍을 삭히느라

제 이파리 제 살 거름 삼아

근 달포 앓아 눕겠구나

 

철새 뜨면

싱싱해지는 살점들

수줍어하는 땅의 문 열어

지령음 연주하고 있다

푸릇하게 웃는 소루쟁이

    

 

 

공기청정기 이주리

 

자아를 구겨 넣고

세월의 필터를 거치는 동안

뼈가 시렸다

(파워를 눌러 주세요)

 

시 한 편 거르는 동안

눈물은 천 번이나 하얀 무명천을 적셨다

(제습기의 버튼을 눌러 주세요)

 

청정한 시 한 편 거르는 동안

어느새 문 밖에서 빨갛게 익어버린 노을

(오오, 이제 운명의 버튼을 눌러 주세요)

    

 

 

맥문동 - 이순향

 

응달 속 주연배우

포기마다 희망 달아

 

조롱조롱 보랏빛 꿈

폭염에도 작은 언약

 

올가을

흑진주 빚어

뉘 마음 데워줄까

 

언 땅에 뿌리 내려

푸른 잎 갈아입고

 

친구들과 어우러져

고운 선율 남실남실

 

꽃대에

우주의 비밀

한 줌씩 들고 있네

 


묵은지 - 정유광

 

여름철 젊은 김치 산뜻해서 맛있고

겨울철 김장김치 시원해서 맛있다만

긴 세월 삭히고 삭힌

묵은 김치 좋아하지

 

눌러뒀던 지난가을 한여름에 꺼내보네

고스란히 담겨진 깊은 맛의 묵은지

마침내 다른 음식을

도와 새로운 맛 만들지

 

세월 지나 나이 들면 묵은지가 되어야지

헛 삭힌 뻣뻣한 성깔 군내 나면 어쩌랴

노인도 젊음과 어울려

아름다움 만드네

    

 

 

작업복 - 민구식

 

남루함에 걸치는 또 하나의 남루

새벽을 여는 동행

게으르기도 막막하기도 한 또 하나의 나

 

무릎이 닳아간다

꿇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는

낮은 자세에 익숙한 바지는

주인을 외면한 채 꿇어있다

 

작은 못 하나에 휘어진 육체 매달린 채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측은한 쓴 내음을 맡는다

 

날마다 내 시간만큼 낡아가는

쇠잔한 고픔이

오늘은 내 곁에 누워 함께 잠들어 있다

 

영일만의 아침이

날개를 단다

    

 

 

자작나무 숲으로 - 마선숙

 

절 지장전

향이 탄다

 

향을 따라가면

자작나무 숲에 이른다

 

은발 영령들의 숲

 

막내아우가 이승에서

자작나무를 좋아했던 건

지름길로 가는 자작나무 숲을 알았기 때문일까

 

저 자작나무 껍질은

하늘로 오르고 싶은 뱀 한 마리

묵은 허물의 잔해일까

그 발자국까지

 

바람결에 영혼들이 운다

으스스 합창한다

 

동생 그리우면

절 지장전 향을 따라

자작나무 숲으로 간다

 

 

                     * 月刊우리1월호(통권 379)에서

                     * 사진 : 제주수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