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마설 – 김석규
이제 고마해라 마이 해 무우따 아이가!
♧ 단풍잎 호수Maple Lake* - 김영호
사랑 하고 싶네
저 성결한 얼굴의 호수 앞에선.
벌레도 사랑할 수 있겠네.
돌도 사랑할 수 있겠네.
짐승도 사랑할 수 있겠네.
원수도 잊을 수 있겠네.
내 운명도 사랑할 수 있겠네.
우주와 사랑할 수 있겠네.
운명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네
슬픔과 눈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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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북쪽 캐스케이드산맥의 한 호수.(2019년 8월 2일 등정)
♧ 느티가 기다리고 있더군 – 나병춘
오백 년 느티낭구가
먼 손차양하고서
여행에 지친 발자국 소릴
기다리고 있더군
그 아래
사마귀를 기르면서
빈 의자 몇 놔두고
쉬었다 가라고 하더군
산만해진 사마귀가 텃세하면서
나를 밀어낼 동안
햇살은 환장하게 쩌르렁 쏟아내면서
도끼다듬이를 더욱 빛나게
다듬고 있더군
그래서 어쩌자고?
적의의 발톱 바짝 세워들고서
♧ 경자년 아침에 – 이규흥
동해의 이마 위로
솟아오르는 해
그 햇살에 눈 맞추며
마음을 씻는다
옳음과 외로움이
빈자리를 요구할 때
안타까운 마음
가련한 마음이
텅 빈 자리를 요구할 때
몸, 비워 주리라
저 찬란한 햇살
세상을 향해 훨훨 타오르도록
♧ 녹차꽃 핀 날 – 임미리
녹차꽃처럼 하얗게 웃고 있었네
옹이 진 솔낭구 아래서
한쪽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그는 느리게 내 이름을 불렀네.
구겨진 신발을 고쳐 신으며
허리를 펴고 그를 보았네.
햇살이 갓 피어나고 있었네.
어디 가느냐고 묻는 물음 사이로
먼 눈빛이 허공을 가르고
녹차꽃은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네.
그의 지팡이가 눈에 들어와
가슴속에 아픈 자리를 잡았네.
차마 등산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네.
잠깐 절에 좀 다녀오려고,
수습하는 대답은 말이 되지 못하고
머쓱해진 마음만 꽃처럼 피어났네.
아직은 찻잎처럼 푸르러야 할 나이인데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황급히 녹차꽃을 향해 웃었네.
추억처럼 이 꽃도 곧 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모른 척 하얗게 웃으며
꽃잎처럼 향기만 휘날리기로 했네.
♧ 고양이 – 남정화
네 울음은 어리고
그러나 네 울음은 서럽지 않다
태중에서 죽은 영혼이 갈아입은 윤회의 옷인가
그러나 네 울음은 아프지 않고 앙칼지다
오히려 다행이다
서러우면 나도 서러운 걸
차라리 너는 섬뜩하다
한밤중에 네 소리를 듣는다
태중 아가의 부름인가
너는 언제나 맑고 높은 소리로 울어준다
♧ 과녁 – 민구식
우산을 쓰고
구름다리 위에 쪼그리고 앚았다
허술한 나를 통과한 화살촉
동심원 가운데 꽂히며
‘명중이요’ 하고는 사라진다
거부를 겹겹이 쌓은 삶이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심장이다
수면이 주름을 펼치면
하늘이 다 들어가고
바람도 깊게 들고
닫은 속 활짝 여는데
수면만 보고 맘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
숱한 중심을 헤며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집
저녁이 되니
두꺼운 나이테 얇아져 간다
♧ 물詩의 집에서 - 김혜천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몬테베키오
베아트리체를 기다리며 수없이 망설이던 곳
그 다리 초입의 거푸집을 지었다
허공의 집
바람의 집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을 잃었다
길은 길 따라 끝이 없고
따라오는 길을 자꾸만 지우는 안개
저 다리를 건너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강물이 강을 버려 바다에 닿듯
나는 무엇을 버려 네게 닿을까
바람이 몸을 풀어 강물을 깨우고
수초가 흔들리다 달의 그림자로 눕는 곳
연잎의 물방울이 흘러 물알을 깨고
물의 신들이 춤을 추는 곳
이곳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신곡 한 편 얻을 수 있다면
휑한 거푸집에 남아 스러져도 좋겠다
* 월간『우리詩』2020년 1월호(통권 37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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