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의 시와 홍매

김창집 2020. 1. 22. 11:09


원본대조필 - 고영숙

 

이 책은 1942년 간행된 편년체 원본이다

쉰 적도 없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전 생애의 기록이고 삶의 보고서다

수많은 배경 중 뼈대 있는 정본을 세우고

종종 바람을 타고 다니던 호시절은

용을 써도 먹히지 않아 생략한다

구겨진 쪽의 빗금 간 시간이 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저항 없는 덮어쓰기로

찢길 일만 남은 목차가 먼지를 쓸어내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우는 낯선 필체

위태로운 행간마다 둥둥 떠다닌다

바람은 곳곳마다 무수한 구멍을 내고

낡은 문장에서 물큰한 울음소리가 묻어나온다

역주행에 쓸려간 물살의 흔적

기진한 몸뚱어리가 사본의 발끝으로 점점 지워진다

서늘한 등짝, 목구멍에 밀려드는 어둠처럼

흩어진 슬하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지문처럼 찍히는 밤

페이지를 넘길수록 몸피가 줄어든다

풀이 죽은 문장들, 맨 끝줄 가까스로 매달리거나

긴 묵독 끝 더듬더듬 통증의 출처를 필사한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낡은 종이

아직 폐기되지 않아 원본대조필 효력이 유효한

아버지,

    

 

 

청동거울의 노래

 

거울 속으로 물고기들이 끌려간다 밤마다

몸을 바꾸는 그림자로 숨어 우는 바깥

심장이 멈춘 자리 귀한 꽃 꺾어 내려놓으니

물색의 잠은 무척 달다

들어왔다 사라지는 망각은 죽은 기억의 거품

이대로 숨어 살까나 철쭉꽃 숨죽여 칼 위에서 춤을 춘다

물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쓸쓸한 이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버려진 꽃잎은 안중에 두지 않고 거울이 남몰래 야위어갔다는 풍문이 떠돌아도

부끄러운 사랑이 늑골로 들어앉는다

한때 몸에 비늘이 돋아나는,

거울을 꿈꾸는 물고기였으니

사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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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가(獻花歌) 신라 성덕왕 때 한 노옹에 의해 불린 4구체 향가.

      

                     *계간제주작가2019년 겨울호(통권67)에서

    

 

 

  -어제 혼자서 면암 유배길답사 취재를 다녀왔다.

    2012년 제주관광공사에서 길을 연 뒤 금 10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 이후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방치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곳이 많았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어떤 분이신가?

    서슬 퍼런 흥선대원군이 벌인 경복궁의 중건과

    이에 따른 당백전의 남발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서원철폐의 비정 등, 바른 소리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던 분 아니신가?

 

    그 뿐만이 아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으며,

    반일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마도에서 단식 절명하신 분 아니신가?

 

    이럴 거면 아예 내지도 말았어야 할 길을,

    엉성하게 내어놓고 관리도 않고 내버렸단 말인가?

 

    오는 길에

    추위 속에서 잎을 연 홍매(紅梅)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