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오영호 시조 '연동리 사설'

김창집 2020. 4. 1. 14:12

 

♧ 연동리* 사설 - 오영호

 

1945년 지축을 흔드는 해방의 만세 소리

36년 멍들대로 멍든 상처뿐인 한반도를

미·소가 꽉 틀어잡고 줄다리기하는 사이

 

1946년 달려온 우파와 좌파 전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현실 앞에

5천석 추곡수집 결정 터져버린 성난 도민

 

1947년 제주북교 3.1절 기념대회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 쟁취’

‘미·소는 간섭을 말라’ 외치는 3만의 군중

 

엇싸, 엇싸 관덕정을 행해 갈 때

날아온 총탄에 6명이 희생되자

분노는 하늘을 찔러 4·3의 불 지필 줄이야

 

1948년 숲이 떨고 바다도 우는 소릴

위정자는 귀가 멀어 듣지를 못했었지

이념의 잣대를 세운 먹장구름 뜬 하늘

 

광풍이 몰아치자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마을을 지키던 팽나무 가지 뚝뚝 부러져

뒹구는 골목길 사이로 이웃들은 금이 가고

 

민주民主니 공산共産이니 언제 들어봤나

춥고 배고픔을 한 방에 날려 보내

모두가 잘 살게 한다는 깃발 아래 모여드는

 

달콤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릴 물고

빨갱이 사냥한다는 무차별 탄압에 맞서

결성한 무장자위대 경찰지서 습격했다

 

이날이 4월 3일 피가 피를 부르자

평화의 손을 잡은 김익렬과 김달삼

오라리 방화사건에 물거품이 되었다

 

한층 더 핏대 올린 미군정 지휘부는

김익렬을 경질하고 박진경을 임명하니

도민들 사시나무 떨듯 떨고 떠 떨었다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박진경 취임의 말에 한라산도 움찔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살벌한 바람 속에

광란의 춤사위가 44일째 되던 날

부하인 문상길 손선호 박진경을 죽였다

 

22세의 젊은 혈기 형장에 선 문 중위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마지막 말은

오늘도 섬 자락마다 동백으로 피고 있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반도에 펄럭이자

남북이 하나 되는 꿈을 품고 뛰고 있던

백범은 가슴을 치며 통곡의 눈물을 삼킬 때

 

밤이면 무장대가 낮엔 토벌대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팽팽한 사선死線 위로

섬사람 목을 조이듯 사상의 늪만 깊어 가더니

 

10월엔 벼락같이 떨어진 비상계엄

당국의 의혹 속에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66명, 도령마루 솔밭 총살된 주검들

 

1949년 1월 11일 중·산간 소개령疏開令에

아끼던 유품과 곡식 항아리에 담아 묻고

콩이나 보리를 볶은 비상식량 짊어지고

 

불 지른 137호 활활 타는 것을 보며

기약도 희망도 없이 길을 따나는 발길

아버지 어머니 삼촌들 찢어지는 가슴 안고

김 씨네는 인연 따라 해변으로 내려가고

박 씨네는 처벌 될까 산으로 올라가는

살아서 돌아오자고 꼭 살아서 돌아오자고

 

마소를 방목하는 검은오름 지날 때

지친 몸을 눕혀 쳐다본 흐린 하늘엔

이제 곧 쏟아질 것 같은 눈구름이 떠 있다

 

찾아간 동굴 속엔 푸드득 박쥐 날자

으아앙,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는

어머니, 부르튼 손에 떨어지는 닭똥 눈물

 

지고 온 양식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춥고 배고픔을 걱정과 두려움에

아버지 아무 말 없이 푹푹 한숨만 쉬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누군가 부르는 소리

밖으로 나가보니 정생이 아들이라

‘여기엔 어떵허영(뭣 때문에) 와시냐 아방 죽어시냐?’

‘아니우다 읍내로 갔던 사람들도 몬딱(모두) 돌아왕

집도 짓젠허고 크게 성담도 다왐수다(쌓고 있다)

무조건 내려 오랜 햄수다 빨리들 그릅써(갑시다)’

 

성담 안엔 바둑판처럼 가른 집터 위에

바둑돌 하나씩 놓듯 초가집 129호

성문城門 안 바로 옆에는 경찰지서와 민보단

 

성담 위 곳곳마다 덩그런 보초막이

성벽엔 자갈 든 깡통 긴 줄에 달아매고

당기면 댕그랑 당글랑 비상벨이 되었다

 

성담밖엔 2m 함정 둔덕엔 실거리나무

그 누가 침범하랴 안도의 문을 닫고

흙담집 한 칸 방에서 새우잠을 잤었다

 

유격대 총사령관 주검 6월의 햇살 아래

십자로 묶어세운 관덕정 넓은 마당엔

길 잃은 까마귀 한 마리 빙빙 돌다 날아갔다

 

10월의 정뜨르비행장 구덩이 길게 파놓고

탕 탕 탕 249명 중엔 나의 형님도 있어

아버진 화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광기의 시대 바람은 날마다 세게 불어

산사람도 무섭고 군경도 무서워서

주민들 갈림길에 서서 안절부절 떨고 떨었다

 

1950년 6.25 동족상잔의 피가 섬까지 튀자

대정지서,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 있던

사상이 의심된다는 예비검속자 200여명

 

견우직녀 만나는 밤 끌고 간 섯알오름

파 놓은 일제 탄약고 둔덕에 세워놓고

탕 탕탕 쓰러진 사람들 엉겨 붙은 백조일손

 

귀순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선무공작에

산으로 피신했다 자수한 3천여 명

끌고 와 가두어 논 주정공장 고구마 창고

 

고구마 선별하듯 손가락 총에 찍힌 남자들

7월 밤 사라봉 앞바다로 배에 싣고 가

돌덩이 몸에 묶인 채 수장해버린 그 날 후

 

의심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는 사람들

서대문,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수감됐다

군·경이 1.4 후퇴 때 동조할까 총살해버린

 

1951년 1월 밤 자정 요란한 깡통소리

아버진 날 안아 들고 파고든 보리짚가리

아버지 쿵쿵거리는 심장 난생처음 느꼈다

 

동트자 씨위이잉 비상의 사이렌 소리

밤샌 주민들이 정문 앞에 모여들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귀를 세워 들었다

 

“강 구장님은 죽창에 눈이 찔려 읍내 도립병원으로 가셔서

서기인 저가 대신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밤

순찰을 돌던 오 씨가 폭도야! 하는 소리에 박 지서장이 나타나자

2명의 폭도가 덮쳐 총을 빼앗아 쏘아 죽였고,

정문 망루에 있던 이 순경은 공비 1명을 발견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지요.(윗주머니엔 미제 숟가락이 반짝이고 있다)

그 후 갑자기 수류탄이 ‘쾅’ 터지자 20여 명이 도주해 버렸다고 합니다.

지서를 비롯하여 여섯 집이 불타버렸고,

소 일곱 마리와 많은 쌀을 털어 가버렸습니다.

그 외 피해 상황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웃들 모여들어 불탄 집 새로 짓고

십시일반 쌀을 모아 인정의 꽃 피웠지만

한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하루하루가 길었다

 

자정子正이면 야경꾼이 각목을 손에 들고

‘딱 딱 딱’ ‘잠자지 맙써’ ‘딱 딱 딱’ ‘잠자지 맙써’

어른들 노루잠을 자다 동이 트면 나왔다

 

산 입에 풀칠하기 너무나 어려워서

무릇과 보리쌀 한 줌 풀어 쑨 맑은 죽

주린 배 달래주려다

헛배만 더 불었다

 

1954년 ‘한라산에 봄이 오다’ 담화문에도

하늘만 쳐다보는 무덤덤한 주민들

3월의 꽃샘바람만 밤낮으로 불었다

 

연화촌 106명 떠도는 원혼들

해마다 남조손오름에 억새풀로 돋아나서

정명正名의 날은 오는가

피고 지고 70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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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리 : 제주시 연동의 옛 이름

 

               *오영호 시조시집 『연동리 사설』(다층현대시조시인선 003,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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