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점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 山田 가는 길
아래턱이 떨어져 나간 노루의 두개골을 주웠다
살도 뼈도 다 녹아 사라지고
두 갈래 뿔만 남은 얼굴이다
젊은 목숨이었을 게다
잘생긴 사내였을 게다
장딴지의 팽팽한 근육으로
이 숲을 바람처럼 날아다녔을 게다
그 겨울, 이 골짜기에 깃든 목숨들이 다만
젊은 노루뿐이었으랴
무자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山田 가는 길
배낭 위에 고이 얹힌 뿔에 다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다
♧ 자화상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에 관하여
달빛도 없었다는데
만삭의 내 어머니
철모르는 뱃속 발길질에
눈물짓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는데
성 밖 오름 정수리 달구던 봉홧불 사그라지고
대숲에 성긴 바람도
숨죽이던 겨울 근처
섬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는데
어머니 배만
봉긋 솟아 있었다는데
뜨끈한 구들장 온기 위로
내가 툭 떨어져 탯줄 자르기 전
외할아버지는 곡괭이 들고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을 다 파헤쳤다는데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
그 씨가 미워서였다는데
배롱꽃처럼 고운
딸을 시집보내 얻은 세 칸 초가집의 평온
그게 부끄러워서였다는데
산에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내들이 많았다는데
저야 알 수 없지요
가을 억새 빈 대궁
깃발로 펄럭이고 죽창 시퍼렇던 밤
멀리 한라산기슭
초가집 활활 불타는 모습이 꼭
대보름 달집 태우는 듯했다는 시절
저야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니 눈물짓기 딱 좋았던
동짓달 스무사흗날 밤
갓난아기는 울지 않았다는데
저야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동짓달 까맣게 사위던 밤이었다는데
♧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삶창, 2017)에서
-- 제주 4.3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은
4월이 오면 한바탕 열병을 앓곤 합니다.
공권력에 의해
집이 불타고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또 가족이나 주변에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10000분의 1이라도 알까요?
그 중에 정치적으로 또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4.3을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은
그런 프레임에 갇혀 전혀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무작정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갖은 폭력으로 못살게 굴어서 가출하게 해놓고선
그렇게 가출해서 항거한 걸 가지고
잘 되었다고 다 죽여 없애버리려 했던
세력들은 그런 본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력이 있는 한
4.3의 완전한 해결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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