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피지 않는 봄
애비 있는 산으로 뛰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죽어라 달렸어요 나도 이제 다섯 살인 걸 서천꽃밭 흐드러진 환생의 꽃무더기 열린 동공 안으로 와락 안기고 날개가 돋으려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요 둥실 떠오르는 몸 아, 날개 생겼나 봐 코끝에 확 스치는 풀냄새 아버지 냄새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 탕, 탕 타타탕!…… 아버지 등에서 흙냄새가 나네요 언제나 잉크냄새 났던 아버지 고개 들어 하는 한 번 봤어요 잉크빛 하늘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아요 나, 잘 뛰었나요? 이제 아버지 만났나요? 졸려요, 아버지 얼굴이 안보여요 등 돌려 나를 봐요 아, 졸려……
철모른 숟가락 하나
떨어뜨린 어느 봄
♧ 벚꽃이 피면
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 치던 어느 겨울 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세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은 등 뒤에 서있었다
시래기 엮듯 포승에 묶여 서 있는 사람들, 절망의 깊이만큼 굽은 허리, 노상 암청색인 거친오름 하늘로 바람 까마귀 한 무리 불안하게 날고
흐릿한 그림자 하나 고개 들어 뒤를 본다
뿌리 약한 나무 낯선 바람에 떨고 있다
살아 있어 불안한 눈빛 그리움에 흔들려 꿈인 듯 생시인 듯 대명천지 눈부신 햇살 찌르듯 파고들어 소리 없는 비명이다
등 뒤로 멀어져가는 그리운 얼굴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다시 올 수 있을까
초점이 흐려진다
죽음의 언덕 오르며
나를 보는 저 슬픈
눈
♧ 섯알오름
감지되던 예감 앞에
더듬이 세운 새벽빛
호명되는 그 이름이 싸늘하게 감겨온다 그 누구 이름일까 휘둘러 살피는데 삽시간 꽂히는 눈빛 등 떠밀며 꽂히는 눈빛 세워 앉은 무릎 풀며 휘청 나설 때 아, 달빛 눈빛 푸른 저 새벽달 최후의 증인처럼 졸졸 따라 나선다 트럭에서 멀어지는 한림 항 갯내음 신사동산 소롯길 지그재그 햇무리 그 속으로 그리운 가족사 드문드문 지나고 죽음의 예고편처럼 길이 마냥 끌려온다 기막힌 사연들이 타전하듯 속삭일 때 귓속말 뚝 끊기고 길도 이젠 끊기고
지상의 마지막 인사
흘려놓은
신발
한
짝
*김영란『몸 파는 여자』(우리시대 시조선 133, 2019)에서
-- 오늘은 4.3 항쟁 72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특별법이 생기고 진상조사가 끝났지 오랜데도
아직도 완연한 해결은 일어지지 않았습니다.
총선이 눈앞인 요즘은
여․야가 그게 상대방의 탓인 양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쪽의 책임이 큰지
다 드러납니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힘든 요즘
어쩔 수 없이 축소해서 추념식을 치렀지만
나이가 점점 많아져 가는 피해자들은
억장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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