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4월호의 詩들(2)

김창집 2020. 4. 8. 13:49

 

♧ 사절가四節歌 - 洪海里

 

함박꽃 벌어질 때면

마냥 올려다보고

제비꽃 날아올 때는

그냥 내려다보는

봄은 그렇게 흘러가 버리고,

 

수련睡蓮을 들여다보다

여름 다 보내고,

 

금강초롱 쳐다보다

가을이 사라져가니,

 

비파枇杷가 흰꽃을 내밀면

비파琵琶 소리와 함께하고

차나무가 운화雲華를 피워낼 때면

찻잔 앞 홀로 앉아 바라다보는

나의 겨울!

 

 

♧ 우수절에 – 도경희

 

가을 겨울 겪으며 촘촘해진 해가

슬그머니 숨어버린 열아흐레 저녁

 

결 고운 바디

명주올 고른다

보시락보시락

밤도 이슥하여라

 

낮은 나무 덤불

가느다란 가지에 오목눈이

꽁지깃 들었다 놨다

디딜방아 놓는 새벽에

 

어머니는 젖가슴 간지럽다

질경이 민들레 느릅나무

뾰족뾰족 파릇파릇 볼이 수줍어

 

기다렸는가

전화벨 소리

저만치 연분홍 참꽃이 참 곱다

 

 

♧ 등대 – 조경진

 

날 저물면 바다에 뜨는 눈이 있다

바다가 눈 꼭 감고 나 몰라라 할 때

손잡아 길 트는 뜨거운 사랑이 있다

 

무심인 듯 굽이칠 줄만 아는 파도를 껴안아

면벽 수행하는 구도자의 경건함이다

 

어둠에 창 열고 깃발 흔들어

미로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거룩한 침묵

한 줄기 불빛 무게로 바다의 벽을 뚫는다

 

홀로 검은 바다의 파수꾼이 되어

쓸쓸에 젖은 등대의 온유

외로움에 길든 시인의 초상이다

 

 

♧ 포맷format - 강동수

 

이제 당신은 이곳에 없습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

화면에 묻어있는 물음표

포맷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손끝으로 누르는 터치

오래된 시간과 그것에 안주하던

사진들이 숨어있던 공간들

그것은 당신을 기억하던 나의 기억들

눈 쌓인 길 위에 남겨진 기록이거나

혹은 너무 푸르러서 슬펐던 배경의 바다이거나

사라진다는 것은 추억을 지우는 일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겠지요

자꾸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에

오늘 처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곳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담았습니다

 

 

♧ 희망 – 박병대

 

살아가며 주저앉은 이 없듯이

절망에 눈물 젖은 날 없듯이

꺾인 삶의 때가 모두에게 있듯이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다시 일어서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시들어 바짝 말라

누리끼리한 희망은 버려야 한다

희망은 늘 싱싱한 풀과 같아야 한다

흐르는 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당신의 희망에 어린 슬픔을 흘러가게 하기 위함이다

밤하늘 별이 반짝이는 것은

당신의 희망을 푸르게 빛내기 위함이다

당신의 심장은 이런 것들과 함께

힘차게 뛰어야 한다

 

 

♧ 산에 취하다 – 이제우

 

매일 매일

오르내리는 삼각산

 

술에 취하지 말고

산에 취하라 한다

 

여름

가을

겨울

 

푸른 옷 입을 때나

오색 단풍으로 치장할 때나

희디흰 눈꽃으로 멋 부릴 때나

모든 것 벗어버린 벌거숭이 때나

 

매일 매일

너에게 취한다.

 

 

♧ 동백꽃 - 한명희

 

우물가 동백꽃

그녀의 분첩 향기가 아버지의

수묵화 안에서 수줍다

 

붓을 놓으신 아버지

화선지가 접힌 후

분첩 뚜껑도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해마다 동백꽃만

저 홀로 피고 또 져도

가마솥 아궁이

장작불은 꺼지질 않았다

 

서럽게 지는 핏빛 꽃빛은

엄마의 반평생 두 다리 힘줄 따라 흘러

툭툭 붉어진 상처

 

올해도 어김없이 동백꽃은 피고

절뚝이는 장구채 장단

어머니의 동백꽃 아가씨

노랫가락마저 붉다

 

                                           *월간『우리詩』(2020년 04월 38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