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는 것에 대하여 – 김석규
졸병으로 군복무할 때 고참들이 자주 하던 말
그래도 육군본부 시계는 돌아간다
애인이 보낸 편지 오기만을 기다릴 때도
휴가 갈 차레 침 묻혀 헤아릴 때도
제대 날짜 달력장 넘겨가며 손꼽을 때도
그래 육군본부 시계는 돌아갔고
눈밭에서 알몸으로 기합 받을 때
고된 훈련으로 몹시 지치고 피곤할 때
추울 때 더울 때 배고플 때 괜히 슬퍼질 때
그렇게나 마디기만 하던 날들도
지내놓고 보면 다 일순이었던
흘러가버린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 오징어와 폴 고갱Paul Gauguin – 차영호
혹자는
니가 까마귀와 척을 지어 오적어(烏賊魚)라고 불리었다지만
혹시 나하고도 척진 적 있니?
나는 너를 보는 족족
다리 잡아 뜯고 몸뚱어리는 쪽쪽
말대꾸조차 하지 않는 너는
앵무조개 같은 이빨을 내 잇새에 꼬옥 끼워 넣는 게 고작이지만
찝찌름하게
버무려진
인연
아까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폴 고갱을 만나
함께 먹먹하였었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 폴 고갱, 1897년, 캔버스에 유화, 139×375cm
♧ 시詩 - 나병춘
1.
내 뒷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2.
까마득 망각해버린
탯줄에 대한 비망록
혹은
시간의 알
3.
사랑
이별
영원한 불완전동사,
나의 신바람으로 춤추는
수평선
♧ 느티나무바위 – 김성중
명옥헌원림 배롱나무 아래
단단한 바위를 사랑해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여리디여린 느티나무
어쩌자고 바위에 뿌리를 내렸을까
배롱나무 숲속에 숨어있는 바위를
느티나무 씨는 어떻게 찾았을까
오늘도 배롱나무 숲에서
느티나무의 꿈이 야무지다
♧ 우리 시대의 영웅 - 민문자
6․25 전쟁통을 겪은 세대
밑바닥에서부터 온갖 고생 다하고
큰 기업을 일구고 호텔 경영까지
입지전적인 자랑스러운 벗
서울 친구들에게는 일본여행을
고향 친구들에게는 중국여행을
한 친구의 가족 실명이 안타까워
수술비도 전하고 동창 애경사마다
거금을 쾌척했다더니
다가올 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도 미리 거금을 건네고
『꽃시』를 받은 벗들 대신해서
내게 시집 값도 톡톡히 내놓았네
고향을 지키는 벗들은 땅부자들
도시화로 돈부자 되었다는데
피땀 어린 돈 아낌없이 공익을 위해
망설임 없이 돈 쓸 줄 아는 벗의
지혜를 본받을 줄 모르고 좋아만 한다
♧ 화엄華嚴 - 김혜천
탄허는
81권
589,352자로
화엄華嚴을 게송했고
프란체스카는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는다 했다
꽃은
제 몸을 찢고
하르르 하르르 향기롭게 피어나
벌 나비 품어 안고
뭇 사람들 웃게 하고
말없이 진다
♧ 간격 – 유덕선
도란도란 얼굴을 맞대고 봄볕을 쪼이는 냉이가 불안하다
한꺼번에 재잘거리며 뛰쳐나올 개나리가 위험하다
아른아른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수상함을 놓친 탓일까
옆 좌석에 붙여놓은 테이블이 불안하다
마스크를 벗은 채로 국물을 삼키는 소리가 위험하다
한 번쯤 재채기가 터질 것 같은 적막이 수상하다
숨겨진 이 봄의 기침과 발열
너와 나의 거리는 적당한가?
* 시 : 월간『우리詩』2020년 08월 386호에서
* 사진 : 이승악 주변(2020. 8. 2.), 포토샵 수채화 효과 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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