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나,
이제
나를 떠나려 한다
이별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자
2020년 7월
김영란
♧ 슬픈 자화상
-나혜석을 다시 읽으며
꽃이 피었다 한들
그대 위해 핀 건 아니야
금지된 소망 앞에
슬픈 꽃말 피어난다고
세상에 맞춰 살라는
그런 말 하지 마
수없이 피고 지는
삶이 곧 사람인 걸
덧칠해도 더 불안한
세월은 마냥 붉고
한 시대 행간을 건너는
여자가 거기 있네
♧ 문득
유턴 지점에서 봄비를 수신했지
직진할까 되돌아갈까 신호 벌써 바뀌고 피다 만 개나리 진달래 눈만 깜빡거렸지 수취인 불명의 너에게 닿고 싶었던 꽃비 내리는 봄밤 떠오른 옛사랑
우표도 소인도 없이 내게 오고 말았지
♧ 그 여름의 기록
왕산거머리 같은 어둠이 밀려온다
함양이란 말이 항암으로 읽히는 날 고독한 혈관 타고 파열음이 쏟아진다 국지성 비가 내리고 유턴 지점 안 보인다 지나쳐온 간이역만 불현듯 아른대고 바람도 목이 메어 오다가 돌아갔나
비린내 온몸에 번져 퍼렇게 야윈 하늘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등대가 보이는 별도봉 둘레길
비석도 산담도 없는 나지막한 무덤 하나, 바다가 그리웠을까 그 너머가 그리웠을까 마지막 의식 치르듯 관 벗어 섬에 들었을, 무연고 세상에 빛 하나 들지 않았을, 기막힌 생애 하나가 울먹이다 누웠을…… 영영 오지 않을 기별일 줄 모르고 선 자리가 누운 자리 될 줄 모르고
나 여기, 있는 줄 아오 입만 벙긋거린다
♧ 해녀콩꽃
낙태한 아이를 버린 분홍빛 고쟁이같이
소로도 못 나면 여자로 나는 거라고 하늘에 해 박은 날이면 칠성판 등에 지고 제 생을 자맥질하듯 저승까지 넘나들던, 어미 팔자 대물림 딸에게 이어질까 몸 풀고 사흘 만에 속죄하듯 물질 가던,
어머니 애간장 녹아 전설처럼 피어난 꽃
* 시 : 김영란 시집『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볼 것 같은』(시인동네 시인선 132, 2020)에서
* 사진 : 해녀콩 꽃(포토샵 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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