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2020 여름호의 시

김창집 2020. 8. 19. 19:59

제주바람 김승립

 

 

친구여, 그대 혹여 제주에 오신다면

소박하나마 그냥 제주바람 한 상 잘 차려 먹이고 싶네

꽃구경도 좋고 이름난 맛집 식탐도 말리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제주의 속살 샅샅이 보고자 한다면

무시로 들락퀴는 바람 세례 마땅히 가슴받이 해야 하지 않겠나

난바다 온통 갈아엎는 제주바람에는 이 땅 통곡의 세월과

제주사람들 일구어온 인고의 삶 마디마디 새겨져 있거든

친구여, 그대 정녕 제주를 그리워하신다면

이곳에 와 제주바람 한 대접 허물없이 들이키고 가시게나

 

꽃구경 - 양순진

 

 

예전엔 나무에 핀 꽃만 꽃인 줄 알았다

 

땅바닥에 뒹구는 죽은 꽃일 때

더 아름다운 꽃

천지간 넘쳐나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때죽나무꽃동백꽃산딸나무꽃왕벚꽃복사꽃감꽃

 

그리고 아흔아홉살에 죽은

외할머니

 

사과꽃 같은 사랑이 지고

 

백년 후에도 천년 후에도 지지 않을

기억의 꽃들

 

죽어버린 이 땅에 흥건하네

 

나의 방식 이윤승

 

 

 송악산 아래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당신에게 오랫동안 소식 전하지 못한, 오늘 소식 한 척 띄웁니다. 가볍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 유배처럼 섬에 닿았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열여덟 해가 흘러갔습니다.

 

 불혹의 사십이 파도에 밀렸나 봅니다. 격랑의 바다 위에 선 배 위에서 망연자실했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수평선과 마주한 섬 끄트머리 송악산, 겨울바람을 맞닥뜨리며 구부정한 해국 한 포기 해안가 언덕배기 손목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먼 바다 집어등 불빛을 끌어안고 잠을 잤습니다. 서쪽 하늘 끝 눈시울이 칸나의 꽃잎처럼 붉었습니다.

 

 계절을 신처럼 믿고 삽니다. 오래전 봄이 신처럼 다녀간 후 긴 겨울 지나 다시 봄입니다. 계절을 신처럼 섬기고 사는 건 계절처럼, 때가 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다시 올 거라는 믿음, 가볍게 살고 싶은 나의 방식입니다.

 

워킹홀리데이 현택훈

 

 

 너는 창고에서 상자를 높이 쌓는다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상자는 무게와 크기가 제각각이다 상자에는 모르는 언어가 인쇄되어 있다 너는 그 언어가 궁금하지 않다 상자를 쌓는 곳에는 천장 가까이 창문이 있다 그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가끔 아일랜드 민요가 들려온다 너는 상자 위에 올라 상자를 쌓고, 또 그 상자 위에 올라 상자를 쌓다가 창문 가까이까지 갔을 때 고향에 대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유리창을 올려다본다 다음날 출근하면 창고에는 상자가 하나도 없다 너는 다시 상자를 쌓기 시작한다

 

  상자에 인쇄된 언어가 낯익어 가만히 들여다본 적 있다 그것은 달빛처럼 살랑거리던 은어 같았다 글자들이 꼬리를 치며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는 야자수 그늘에서 딱딱한 빵을 먹는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어서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까지 가서 돌멩이를 던지고 온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연고지로 한 축구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너도 맥주를 마시며 홈그라운드 축구팀을 응원한다 상자를 쌓듯 하루가 쌓인다 너는 쉬는 시간에 가끔 수첩을 꺼내 모국어로 편지를 쓴다 받는 사람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너에게

 

나는 자주 불안을 물어뜯었다 - 김진숙

 

 

떠나지 못한 섬은 늘 바다를 맴돌았지

한소끔 파도를 끓여 문밖에다 내걸면

하얗게 생의 노래는 자주 닻을 내렸고,

 

나는 늘 아비에게 가장 아픈 새끼손가락

촛불 켠 소녀처럼 기도란 걸 처음 했지

불안이 커지지 않게 물어뜯곤 했던 밤

 

손톱과 불안 사이 불안과 결핍 사이

어둠을 갉아대도 이빨은 또 자라나서

남몰래 초승의 한 획 훔치고도 싶었지

 

잘근잘근 씹어대는 어제의 결심들이

혀끝에 닿았다가 툭, 떨어져 달아날 때

그토록 뱉고 싶던 말 이름 석 자 아버지

 

 

                   * 제주작가2020 여름호(제주작가회의)에서

                                   * 사진 여름 더덕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