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 시집『운동부족』이
시집 전문서점인 시옷서점과 한그루 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발간하는 시집 복간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리본시선’의 두 번째 시집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는데,
오늘 비 때문에 오름에도 못 가고 앉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1시간여의 집안 수색 끝에 원본을 찾아냈다.
발간 당시 시집 표지에 ‘광대가 쓰는 시’라 부기한 것과
‘자서(自序)’에 ‘나의 시들을/ 고통 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근절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아내와 예쁜 딸 소영이에게 바친다.’로 보아
‘힘든 세상에 대단한 결기를 보이는 몇 안 되는 친구로구나’하고 생각했었다.
한편으로,
시 2편에 나오는 내용만 생각하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
만나면 움찔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어쩌지 못하고 나이만 키워온 셈이다.
하지만 시인은 처녀시집의 선언을 굳게 지키며 살아 왔고,
그가 말하는 ‘운동’에 앞장서서 시종일관 지조를 지키고 있다.
시집 복간을 축하하며
건투를 빈다.
♧ 운동부족 1 – 김경훈
당연히
운동부족이죠
그 탱탱하던 탄력은 어디로 갔나요
나이 탓이 아니예요
운동부족이라니까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운동은 또 뭐냐구요
변명은 쓸데없는 군살을 늘릴 뿐이에요
정확히 말해서
당신은 게으른 방관자에요
단식을 겁내는 아랫배의 식욕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세요
모든 서 훌훌 털고
피를 짜내는 긴장
탄탄한 짜임으로 살아
땀나는 노동을 하세요
살길은 이것뿐이라니까요
운동을 하세요
♧ 운동부족 2
그저 적당히
비판당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비판하고
매 안 맞을 만큼만 적당히 게기고
잡혀가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투쟁을 외치고
그래서 적당히
살도 찌고 배도 나오고 얼굴에 적당히 개기름도 흐르고
그래서 적당히 살림도 차리고 적당히 아이도 기르고
그렇게 적당히 여유도 있고
그렇게 적당히 부족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적당치 않아 보이는 것들에 대해
적당히 아주 적당히
경멸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적당히
동정하고, 비웃기도 하면서
피 찰찰 흐르는 고민은 항상 시간이 없고
땀 팡팡 나는 실천은 항상 딴 사람 몫이고
그리하여 마땅히 적당한 때
적당한 곳에서 적당히 꽃피는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적당히 아주
아주 적당히
살해되고 아주 흔적도 없이 적당히 버려지는
그런 적당한 사회에
적당한 인간으로
적당히 길들여지는 적당한 법칙 안에 적당히
적응하는 그래서 동물적인
그래서 적당한 당신은
♧ 운동부족 4
게으름
충동성과 자만
무기력과 패배주의
불성실 속에
대중이 없는 운동적 가식
미지근한 싸움
불철저한 자기관리 속에
아메리카는 당연히 커가고 있다
통일의 신혼살이
그 황홀한 첫날밤의 동맹의
꿈이
38선 180km 방벽 가진 자의 전횡
속에서 미제 살인무기
교활한 무기
추잡한 음모 핵폭탄 속에서
내 나라는 더욱 당연히
커가고 있다
*시 : 김경훈 시집『운동부족』(오름시선 3, 1993)에서
*사진 : 제주작가회의 공식 카페에서 뽑음.
*강정평화대행진에서(뒷줄 오른쪽 3번째, 수박을 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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