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란바다에 오렌지색 테왁을 보며 - 홍경희
사흘이 멀다 하고 불어오는 바람
제주의 바람은 거세게 불어온다
가을 겨울에 물질하는 해녀
뼛속 깊이까지 시린 날 많아
배를 타고 비양도 앞 바다로 향해
어머니는 무사안녕을 빌면서 발을 뗀다
테왁을 물에 던지면 시작이다
숨을 참으며 작업을 하다보면
조금 전에 있었던 서운함이나 화가 났던
일들은 파도가 밀어낸다
힘든 노동이지만 그 안에서 사투를 벌이다 보면
내면이 단단해지면서 어머니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제주의 어머니는 바다밭과 마른밭 가리지 않아
어디든 일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선다
♧ 해녀의 기도 – 김옥순
밀알이 썩어서 밑거름이 되듯
해녀의 일생으로 살아온 날들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수경 밖의 세상은 바다지만
마음 안에 세상은 사랑이란 걸
잊지 않고
동반자인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길
그 길에서 사랑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거친 바다 밭에서
수확 없는 빈손 들고
수면 위의 숨비소리에도
실망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가끔은 경쟁자가 될 때도 있지먼
서로에게 다독이며
자매처럼
우애 깊은 사이가 지속되게 하소서
해녀의 길을
천직으로 믿으며
바다의 무대에서는 주연으로서
후회 없는 공간이 되게 하소서
타인의 입장에서 나를 보고
내 입장에서 타인을 보는 지혜가 자라나서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고달프고 힘들 때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한 명의 낙오자 없이
함께 끝까지 같은 길 걷게 하소서.
건강이 다 하는 날까지
바다에게 나에게 동료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 어머니의 허리끈 – 김종호
바람의 길목에 떠 흐르는 섬
태풍에 쓰러진 늙은 팽나무
천년 이야기를 다시 세울 때
여인은 허리끈을 조였다
들판에 몽골의 말발굽소리 내달리고
일본도 칼날이 해를 가릴 때에
여인은 죽을힘으로 배고픈 허리끈을 질끈 동였다
4․3 미친바람 누대의 돌담을 무너뜨리고
폐허의 돌밭에 까마귀 우짖을 때에
여인은 피 묻은 허리끈을 조이고 조였다
제주 돌밭에 북서계절풍은 끝없이 불고
호미가 닳고, 칠성판을 지고 물에 들어
이 땅의 포악과 황폐를 달래며
ᄀᆞ웃ᄀᆞ웃 타지는 숨
호오이…
하늘 끝자락에 숨비소리 처연할 때
당신은 연약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하늘의 손,
보시라!
지금은 천혜의 복된 땅,
변방의 유배의 땅이 아니다
한숨은 노래가 되고
인고는 훨훨 춤사위가 되나니
호오이…
몇 길 물속 바닥을 차고나와
오늘은 동쪽하늘에 무지개가 떴구나
다시 천년의 새 말개 직조하려고
여인은 질끈 새 허리끈을 조이고 있다.
♧ 해녀 누이 – 김충림
열두 살 누이는
겨우 허리에 닿는
얕은 물에서 팡당거리며
우미며 보말을 물질하여
공책이며 연필을 샀지.
무르익은 스무 살
상군 해녀, 한 번 물질에
미역, 소라며 전복 성게
한 짐 부치게 지고 나와
집안 살림도 제 어깨에 짊어졌지.
물질이 칠성판을 지고 하는 일
ᄀᆞ옷ᄀᆞ옷 타지는 숨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차고 나와
호-오-이 긴 숨비소리로
그제야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그래도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시집 간 지 반백년에
다섯 남매 다 성가시키고
테왁 망사리 숙명처럼 지고
오늘도 바다로 절뚝거리며 간다.
♧ 해녀의 눈 - 김영란
해녀의 물안경을
눈이라고 합니다
통눈은 왕눈이, 두 눈짜리 족쇄눈, 쑥 한 줌 비벼 닦으면 바닷길이 환해지죠 물 한 모금 허락 않는 열 길 물속에서 칠성판 등에 지고 목숨값 얻으러 갈 때마다 눈멀어 귀멀어 세상에서 멀어져도
눈 쓰고 퍼렇게 눈 뜨고
눈을 건져 올리죠
♧ 문득 – 문순자
-친정 바다 2
큰딸아이 설거지소리
오늘 문득 귀에 익다
물질 갔다 돌아와 수평선도 재워놓고
늦은 밤
친정바다가
숟가락을 딸깍이는
*애월문학 제11호 특집 ‘한림해녀들의 삶과 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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