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서열 - 김영란
나 죽어 부고에 뭐라 쓸까 궁금하네
종이신문 부고 보다 그게 문득 궁금하네 세상과 이별이라 별세했다 할 것인가 영원히 잠들었다 영면이라 할 것인가 고인 되었다 작고했다 인간계 떠났다 할 것인가 죽어 세상 떠나도 서열은 남아있어 사망 위에 별세 별세 위 타계 타계 위 서거 그 위엔 또 뭘까 죽어 한 줌 재 누구나 매한가진 걸
난 그냥,
잘 갔다고만
그렇게 좀 전해주오
♧ 목백일홍 필 무렵 - 김영숙
팔월이면 내 가슴에
조잘조잘 피는 꽃
하하호호 피어서
눈물 번져 오는 꽃
울 언니 가슴에 피어
내내 지지 않는 꽃
마지막 입은 옷이
하필이면 그 꽃무늬
흑단머리 샴푸향이
코끝에 서성일 때
꽃분홍 목백일홍이
열꽃처럼 핀다네
♧ 명란젓 –김정숙
홍수에
다 떠내려갈 때
지붕 위로
올라갔던 소
깊은 눈
굴리던 그 소
쌍둥이를
낳았대
그 후론
못 먹겠는 거야
산란기의
바다는
♧ 수상한집 - 김진숙
나, 여기 돌아왔네, 늑골 같은 집 한 채
오사카 이쿠노쿠 밀항의 시간 너머
누명 쓴 삼십일 년을 무엇이라 부를까
돌아누울 때마다 옆구리로 새는 바람
마른 잎 한 잎에도 툭툭 마음이 꺾였을
슬픔이 슬프지 않게 창을 열어 두지요
열어둔 나의 창으로 돌아오는 계절들
새들은 갸웃갸웃 노랫소리 그려놓고
무릎은 관악기처럼 잠에서 깨어나요
무죄요 당신은 무죄, 재심판결 그날처럼
수상한 나의 기록 다시 쓰는 지붕 아래
길 잃은 당신을 위해 방을 비워둘게요
♧ 빛의 벙커 – 장영춘
-반 고흐 전
툭툭 찍은 점들이
어둠 속에 길을 낸다
붓 자국 가는 곳마다 길이 되고 숲을 이뤄
밀밭에 까마귀 떼들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마다 꿈을 꾸며
저 들판을 달렸었지
지는 해 온기를 담아 끊임없이 덧칠해도
허기진 삶의 모퉁이 소용돌이로 떠밀리는
검푸른 하늘에는
그래도 태양은 떴다
밤마다 별똥별이 속절없이 떨어져도
방안의 해바라기 꽃
피다 지고, 피다 지고
♧ 절제의 미 - 조한일
고샅길
철조망 안
맘들이 머뭇댄다
오름을 내달리던
고려의
오랜 본능
검객이
칼집에 든 검을
빼다
도로
넣듯이
♧ 소맥*시대 - 한희정
빌딩 숲 샛길로 바람 맞은 반달이 간다
깐깐한 척 하다가도 때론 무던하게
이분법, 하나 되기까지 모서리를 깎는다
어색한 뒤엉킴으로 서로에게 서로를
옳고 그름의 말들이 은하 속으로 사라지고
한잔 술, 도시의 달은 경계를 풀고 있다
---
* 소주와 맥주를 섞은 혼합주의 일종
*글 : 『제주작가』2020 가을호(통권 70호)에서
*사진 : 한라산의 가을(수채화 효과)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 발간 (0) | 2020.12.10 |
---|---|
'우리詩' 2020년 12월호의 시들(1) (0) | 2020.12.04 |
갈대의 흔들림에 관하여 (0) | 2020.11.22 |
'애월문학' 2020년 제11호의 해녀 시 (0) | 2020.11.17 |
고성기 시집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2) (0) | 2020.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