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영일기 - 김석규
목에 군번줄 걸었던 논산훈련소
그 가을의 기러기 아직도 날고
군가 소리 하늘로 파랗게 번져가네
혁명의 불꽃은 더 거세게 타올랐고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가 되었던
사격장의 탄흔은 과녁에서 한참 벗어나
소총을 입에 물고 뛰어갔네
담요를 걷어차 던지는 고단한 잠자리
밤마다 고향을 꿈꾸던 머리맡에
나뭇잎 날리고 가을도 어느새 저물어
마지막으로 비 내리는 십일월
길게 기적을 끌며 군용열차는 떠나고
배치된 전방의 산간에 낯설기만 한 적설
사흘들이 눈이 퍼붓는 밤마다 잠 설쳐가며
막사 지붕에 쌓이는 눈 치우다 보면
예사로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도 만나고
갓 단 일등병 계급장도 꽁꽁 얼어붙었던
긴 겨울을 눈 덮인 조국의 산하.
♧ 강江 사유思惟 - 정순영
유유히 흐르는 강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강에 잠긴
산의 계곡을 카랑카랑 울리는 시냇물소리와 나뭇잎 살랑살랑 속삭이는 바람소리와
산사의 종소리와 목어소리와
임 그리워 밤을 지새우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자드락 길섶에 이슬 머금고 피는 풀꽃의 그 청아한 미소와
해맑은 여명자락을 걸친 산등선의
하늘 깊은 소리를 얻어
시를 읊고는
그 소리가 탁해질까 노심초사하는 사유를
은빛 금빛 비늘 번뜩거리는 강을 바라보며 추스르는 것이네
♧ 커피에 취하고 술에 깨고 - 김동호
친구 갔다는 비보에
커피 진하게 한 잔 하고
찾아가는 장례식장 영안실
弔花에 둘러싸여
절 받으며 香 받으며
난생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고 있는 영정 속
친구와 작별인사 오래 하고
떠들썩 시끄러운 조객들 사이에 기어
쓴 술 한 잔 또 한 잔 기울이다가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
나, 정신 맑다. 커피에 취하고
술로 깰 때 내 가장 정신 맑다
중천에 뜬 달이
李白과 함께
나를 동행해 주는 것 같다
♧ 환승 - 배기환
정오가 되자 지상의 시계탑에선 째깍째깍
시간의 분말들이 흘러내리고 흘러내리는 시간 속으로
나랏일은 공감하지 못할 일들이 범람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들어선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달려오는 텅 빈 전동차
전동차의 전광판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배설하고 있다.
오늘따라 어둑한 차창으로 비치는 내 모습이
왜 이리 허술하고 낯설어 보이는 것일까
환승을 빌미로 한동안 전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 그렇다. 내 운명도 내 뜻대로 환승할 수 있다면
한적한 예순 고개의 가을 역에 뛰어내려
봄부터 여름까지 금빛 꽃망울로 사랑을 속삭이다가
붉게 잘 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산수유나무로 우뚝 서서 이 생각 저 생각 뒤적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갉아먹고 싶다.
♧ 하늘과 구름 - 김미외
아무도 그에게 높이를 알려준 바 없기에
구름은 마냥 하늘이 자유롭다
바람이 떠미는 손짓에 장난인가 해서 올라갔다가
보드라운 살결 환장할 뜨거움에 데여
거무스름하게 그을려 내려오다
풋내 떨구지 못한 마음 서러워
허공의 틈새에 주저앉아
움켜쥔 한 방울 남은 물기마저 떨어뜨린다
오름길 끝 번개를 맴돌게 하는 하늘이 서글픈
구름 깃털엔 여물지 못한 물방울의 울음이 붉다
♧ 오작교烏鵲橋 - 민문자
어머니 가시고 스무닷새, 칠월 칠석 하늘이 참 높다
97세 어머니는 풋풋한 신부로 변신하셨겠지?
오늘 밤 어둠이 내리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오작교를 놓으면 선남선녀가 다리 양쪽에서 달려와
62년 만에 서로 부둥켜 포옹할
39세 아버지, 35세 어머니 행복하세요!
비 내리지 않고 달님이 방끗 웃어주면 좋겠다
나는 『꽃시』 직녀
오늘 밤 만날 견우를 기다린다
시인에게 독자는 견우이지
집 앞 중학교 도서관 <지혜의 샘>에서
나를 초대한 견우님들이 열세 명이나 된다네
견우님들과 함께 『꽃시』 이야기로 오늘 밤은 행복할 거야
세모시 한복 차림으로 가슴 설레며 8시가 되기를 기다리네
* 글 : 월간 『우리詩』 2020년 12월 390호에서
* 사진 : 만추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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