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2020년 12월호의 시들(2)

김창집 2020. 12. 13. 01:21

다시 멸치 한 움큼 - 민구식

 

멸치 한 줌 다듬는다

마르고 썩은 속을 다 버리고 나면

남은 육체는 꼬리뿐이지만

태평양 비린내를 토해내려고

끓는 냄비에서 자맥질을 한다

 

너를 위해 나를 우려내는 인내가

허우적거리며

짠내 나는 항해일지를 읽고 있다

 

마른 생의 눈물 우려내고 나면

온전히 버려지는 육체

나는 언제나 너의 배경이라며

지느러미 눕히는 멸치는

낡은 무명 치마 색깔이 된다

 

은빛 비늘은

엄니 땀내를 털어놓고 갔다

 

떨어진 은행잎 - 정유광

 

떨어진 어제의 잎이 오늘의 잎 업고서

바람처럼 일어나 발걸음에 맞선다

주름진 노인 이마에

구슬땀이 솟는다

 

지난날 아우성이 시간 따라 울려 오듯

버릴 건 쓸어 담고 잊을 건 날려 보낸

낙엽들 휘날릴 때마다

들어본다. 어제 같은 날

 

예루살렘 - 권순혜

 

   안개가 자주 매봉산 귀퉁이를 파먹는 곳, 집집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 낯선 사람에게 개가 꼬리를 흔드는 곳,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전봇대 뒤에 오줌을 누고 가는 곳, 길을 잘못 든 사람이 찢어진 선거벽보가 붙어 있는 폐가에 눌러앉는 곳, 느티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아침마다 젊은 이장의 문안 인사가 울려 퍼지는 곳, 욕을 먹어도 싫지 않은 곳, 원수를 사랑하며 착하게 살고 싶은 곳, 서로의 마음을 울타리 없이 드나들며 기대어 사는 성지聖地

 

일련의 연애 사건 목격담 - 여연

 

   달이 호수 위를 거닐 때 부스럭거리며 부서지는 물결을 보았다 조각난 물결이 갈변을 앓는 풀섶 아래 후미진 흙 밑으로 밀려왔다 자락자락 발끝으로 모래 밟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은반에 별이 누웠다 달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별을 덮었다 나무 위에서 떡갈잎이 입술을 잘끈거리며 귀밑까지 빨개진 얼굴로 눈을 감고 돌아서다가 가지에서 미끄러졌다 어떤 잎은 놀라 노랗게 질린 얼굴을 치마로 가렸다 밤벌레가 찌악찌악 소리쳤다 온 숲이 얼굴을 붉혔다 어쩌나 저리도 밟고 밟히며 사위어가는데, 흔들리고 눕고 일어서면서 있기도 없기도 하는 몸들이 시방 마지막 빛을 뿜어내고 있다 형체도 없이 새벽은 오겠다

 

통점 - 이상욱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한기는 문틈에서 잠자고

세월을 염색한 마루는 햇살을 모은다

고구마가 장독 채 위에서 말라가고

가마솥에서도 익는 퍼즐 조각

반복되는 것은 옻칠 같은 것을,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분명 그랬다

꽃이 만발하고 새소리 가득했다

허리 잘린 뒷산

산 이도 죽은 이도 뿔뿔이 흩어진 고향

꽃들은 어디에서 피고 질까

기억만 골목을 배회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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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에서 인용.

 

소한 도경희

 

차가운 녹내장이 시작된 저수지

살얼음 반 너머 깔리자

주저함 없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따뜻한 운석

얼음에 쩡 금이 간다

밤 깊을수록 하늘 팽팽해지고

풍덩 풍 잔 메아리 일구며

돌 떨어지는 소리 잦다

물의 가슴 뚫리면서

너울에 솔개바람이 인다

목숨의 둘레를 돌려가며

갑옷 구명처럼 홀쳐서 찢어지지 않게 깁고 있다

무리를 이끄느라 피멍 든 죽지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 채

세상의 후미진 밑바닥 훑어서

밥 벌어오던 아버지

 

 

                                             * 월간 우리시202012(39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