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화두 - 洪海里
여러 해 전
밀차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설 때
내가 살아서
살아서 내가
이 문을 나설 수 있을까 했었는데
중환자실에 아내를 두고 나와
집에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올 수 있을까 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2020년 11월 12일 새벽 두 시 반
끝내 아내는 갔다
새벽 두 시 퍼뜩 잠이 깨
“사는 게 무엇인가
숨을 쉬는 것인가
밥을 먹는 것인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인가”
왜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를까 하고
끼적이고 있는데
급히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아내가 내게 던져준 마지막 화두였다
처음 가는 길이라서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처음 가는 마지막 길이라서
아내가 혼자서 어떻게 갈지 걱정이 된다
“부디 잘 가요, 여보
이승에서 못난 사람 만나 고생 많았어요”
아내 가는 길에 흰 국화 한 송이 뿌리니
눈물도 한 덩이 뚝 떨어진다.
♧ 오리엔탈골리앗왕꽃무지 - 김혜천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어스름부터 숲을 뒤졌으나 은신처가 깊다
야행성 곤충들은 달빛을 따라 길을 찾는다
은은한 암내를 풍기는 나무껍질을 벗겨 놓고
텐트에 불을 켜 놓으면 보름달이 환하다
날파리부터 아귀사마귀 암살노린재까지
모두 걸어 나와 도감을 그린다
숲은 한 바퀴 걸어 나와도 그는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유배되어 몸을 숨긴 동굴은 깊고 습하다
걸어 나온 숲을 다시 한 바퀴 돌아 나왔을 때
어둠을 빠져나온 오리엔탈골리앗왕꽃무지* 부부
세크로피아 축축한 양수 위에 신방을 차리고 있다
날마다 소멸되어 굳어버린 내 의식의 나비가
푸른빛으로 날아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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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풍덩이과의 한 종.
♧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 홍인우
터무니없이 붉게 타오르는 칸나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현관 열쇠처럼
있다가 없다가
없다가 있다가
내가 있는 곳
바람이 잠시 머무는 곳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 자벌레 - 임보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의 선승처럼
어느 성지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가사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맨몸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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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걸음마다 활처럼 온몸을 굽혀 하는 절.
♧ 연분홍 치매 - 박문희
할머니 오늘도
아들이 12시 차로 올 거라며 복도 끝만 바라봅니다
해가 서산에 걸리도록
같은 노래만 흥얼거립니다
‘연분홍 치매*가 봄바람이 시날리드라’
두 볼이 지는 해에 볼그레 물듭니다
연분홍 치매가 오늘도 꽃시절에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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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 ‘치마’의 경상도 방언.
♧ 와유강산臥遊江山 - 김영호
강산은 편히 누워 복된 생을 누리네.
산밑에 강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네.
풀잎들은 양들에게 젖을 물리고
강이 사슴가족에게 젖을 물리네.
자연은 자족 감사로 평화를 누리는데
사람만이 경쟁하며 초조하네.
자연은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데
사람만이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네.
자연은 권력도 부귀도 모르는데
사람만이 힘과 부를 찾네.
산천초목은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사람만이 교만 무례하고 차별을 하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날로 확산되는데
산수山水같이 평화를 누릴 날이 언제일까.
자연처럼 다정한 사람이 그리워지네.
신의 자비가 그리워지네.
2021년 마지막 주가 열렸다.
맡은 일에 진척이 없다 보니
날 가는 것도 짐이다.
작년에 끝냈어야 하는 일을
올해로 넘겨서 벌써 한 달이 다 간다.
그래도 운동은 해야 한다 해서
잠시 나와 들길로 접어들었는데,
겨울 눈 속에 꽃봉오리를 건사했다가
광대나물 꽃이 이렇게
무더기무더기 피었다.
* 월간 『우리詩』 2021년 01월(통권 39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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