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질을 하다 – 오영호
굳을 대로 굳어버린 땅을 일구는 건
닫힌 마음 밭에 소통의 문 여는 것
엎어 논 흙더미 위로
가을빛이 선연하다
몇 평 삽질 끝에 온 몸이 뻐근하다
허릴 펴 하늘 보니 잠자리가 맴을 돈다
솔숲을 건너온 바람이
이마의 땀 식혀준다
깨부순 흙덩어리에 지렁이 한 마리가
세상이 너무 지겨운지 온몸을 뒤틀린다
가만히 흙을 덮어주었다
마음 한 쪽 시리다
뿌리고 심어놓은 무씨와 쪽파뿌리
흙의 품에 안겨 새싹을 밀어 올리는
숨소릴 듣고 싶지만
막혀버린 나의 귀
♧ 닭가슴살 – 이애자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품을 벗어나도 못해준 기억만 남아
어미의 가슴은 온통 빗살로 그어져 있다
♧ 노각* – 장영춘
한때는 우리도 말이야,
금빛 두른 노장들
푸른 날
물러지며 잘 익은 말씀만 남아
한 생의
쓰고도 단맛 소주잔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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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각 : 늙은 오이.
♧ 수크령 – 조한일
수렁에서 날 건져준
그 사람을 위해서
들녘에 스크럼 짜고
하늘 보고 누웠어요
그 사람
해코지하면
가만두지 않아요
♧ 퍼즐 조각 맞추기 - 한희정
늙은 호박 진피층에 아직 남은 초록빛이,
깎이고 무너지며 걸어 온 고해의 길에
반듯이 각을 세워도 뭉근해지던 그 시간
텃밭을 배회하다가, 호박덩이에 앉았다가
치매 말기 할머니가 불쑥 맞춘 기억조각
“식겟날 호박탕시 허라, 모랑허게 먹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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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호박나물 해라, 부드럽게 먹어보자.”의 제주어
♧ 낭만보존의 법칙 - 김진숙
다 낡아 해진 시간을 내다버리지 못했다
기어코 계절을 따라 외출했던 구두 한 켤레
오래된 굽을 버리고 저만 혼자 돌아왔다
신발장 기억의 지층 기댄 날들 많았을까
또각또각 가슴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한 줄도 지우지 못하겠다 마지막 귀가처럼
* 시조 : 계간 『제주작가』(2020년 겨울호, 통권 71호)에서
* 사진 : 차가운 돌과 나무를 안고 겨울을 나는 콩짜개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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