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2021년 2월호의 시(1)

김창집 2021. 2. 1. 16:09

 

앰뷸런스 - 김동원

 

오늘 하루가 이 지상에서

그냥 흘러가도 되는 줄 알았다.

너를 만나기 전엔,

오늘 하루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날인 줄 알았다.

너를 만나기 전엔,

저 길거리에 봄이 그냥 오는 줄 알았다.

그냥, 매화가 피고

그냥, 목련 꽃잎이 떨어지고

아까운 목숨들이 간밤에 사라져가도,

음압병실에 실려 가는

그 다급한 앰뷸런스 소리를 듣기 전,

오늘 하루는

마음대로 쓰다 버리는 몸인 줄 알았다.

한 번도 절실하게 별을 쳐다보지 못한 눈빛

너를 만난 후,

39.5의 열에 들떠 어둠 속 허우적거려야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찢어진 어둠을 기우며 최대남

 

나 죽어 고혼으로 어디쯤

푸르게 피어 있거든

당신, 한 번만 다녀갔으면

 

나인 줄 모르고

푸른 꽃 바라보며

문득 나를 떠올렸으면

 

순간 나, 전생의 처절한

그리움 잊고

당신의 가슴에 향기로 앉아

부드럽게 당신 손 잡아보고 싶어

그때 내 눈물 이슬이겠지

 

나 죽어 한 줌 넋이 되거든

당신 품에 스며드는 바람이었으면

 

바다 위를 거니는 햇살을 모두어

어긋나 울던 내 마음 다 가리고

당신 발 아래로 달려가

머리 풀고 쓰러지는

파도였으면

 

이승의 인연 묻고 싶지 않아

돌처럼 아프게 돌아선 이유도

알고 싶지 않아

 

그냥 한 번만

없는 나 떠올리며

후회 같은 신음으로

내 이름 불러주면 돼

 

부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를

 

 

폭설 - 나병춘

 

한 점

한 점 내려서

금을 지우고 벽을 지우고

 

두터운

솜이불이

그대와 날 푹 덮는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난생 처음 본다

눈부신 설국으로 떠나는 열차

 

 

먹줄을 튕기며 박동남

 

만물은 중심축이 있다

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흩어져버린다

축을 세우고 덧입히는 살점

축을 잡고 버티는 원리는 변수가 없다

세상도 천체도 기준 없이 세워진 것이 어디 있으랴

기준은 법이다

필수다

무법천지도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먹줄보다 민감한 레벨기

그리고 측정기

축은 갈수록 보완되고 있다

 

 

- 성숙옥

 

가랑비에 씻은 겨울산을

땅에 앉힌다

 

뿌리와 뿌리를 잇는 실핏줄이 끓어오르고

칙칙칙

꽃샘바람을

뿌리며 도는 추

 

마침내 열린 뚜껑

 

꽃과 새싹으로

갓 지어진 봄

 

주린 눈에

고봉으로 담긴 산수유와 진달래를

양껏 넣는다

 

 

바람의 수화 - 김혜천

 

그 많던 호기심과 환호

형형색색이 퇴색되고

황량한 벌판에 누워

풍장 되어 가는 검불들

 

상처투성이 주검들을 한아름 안아본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

바스락, 신음이 아리다

 

죽은 듯 하였으나

살아있었구나

말라감은 네가 아니라

나의 내부였구나

바람에 섞인 사견들이 정신과 육체에 침투해

촘촘한 직조를 흔들고 있었구나

 

삭제될 뻔했던 너와 나

 

뒤돌아보니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흔들리며 바스락대며 손짓하는

 

 

운수재韻壽齋 - 임보

   -운수재 풍경1

 

운수재韻壽齋는 내 집의 당호다

시가 오래 가는 집이란 뜻

 

우이동의 삼각산 밑 동네인데

소속은 도봉구로 되어 있고

새주소는 삼양로로 표시된다

 

80여 평의 대지에 세운 2층 양옥인데

운수재에 기거한 지 근 반 세기

이젠 낡아서 여기저기 비가 새기도 한다

 

현관, 마루, 안방, 건넌방, 2

헌 책들이 온통 점령해서 숨이 막힌다

인가人家가 아니라 서고書庫라고 할까?

책들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다

 

별로 쓸모도 없는 시집 나부랭이들

저놈들을 어떻게 처치한다?

요즘 내가 안고 있는 큰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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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재 : 행정구역상 지번은 도봉구 삼양로 538-17이지만

통상 나는 삼각산 밑 우이동에 산다고 말한다.

 

 

                                        □ 월간 우리20210239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