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2020년 겨울호의 시조(2)

김창집 2021. 1. 27. 10:28

삽질을 하다 오영호

 

굳을 대로 굳어버린 땅을 일구는 건

닫힌 마음 밭에 소통의 문 여는 것

엎어 논 흙더미 위로

가을빛이 선연하다

 

몇 평 삽질 끝에 온 몸이 뻐근하다

허릴 펴 하늘 보니 잠자리가 맴을 돈다

솔숲을 건너온 바람이

이마의 땀 식혀준다

 

깨부순 흙덩어리에 지렁이 한 마리가

세상이 너무 지겨운지 온몸을 뒤틀린다

가만히 흙을 덮어주었다

마음 한 쪽 시리다

 

뿌리고 심어놓은 무씨와 쪽파뿌리

흙의 품에 안겨 새싹을 밀어 올리는

숨소릴 듣고 싶지만

막혀버린 나의 귀

 

닭가슴살 이애자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품을 벗어나도 못해준 기억만 남아

어미의 가슴은 온통 빗살로 그어져 있다

 

노각* 장영춘

 

한때는 우리도 말이야,

금빛 두른 노장들

 

푸른 날

물러지며 잘 익은 말씀만 남아

 

한 생의

쓰고도 단맛 소주잔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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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각 : 늙은 오이.

 

수크령 조한일

 

수렁에서 날 건져준

그 사람을 위해서

 

들녘에 스크럼 짜고

하늘 보고 누웠어요

 

그 사람

해코지하면

가만두지 않아요

 

퍼즐 조각 맞추기 - 한희정

 

늙은 호박 진피층에 아직 남은 초록빛이,

 

깎이고 무너지며 걸어 온 고해의 길에

 

반듯이 각을 세워도 뭉근해지던 그 시간

 

텃밭을 배회하다가, 호박덩이에 앉았다가

 

치매 말기 할머니가 불쑥 맞춘 기억조각

 

식겟날 호박탕시 허라, 모랑허게 먹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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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호박나물 해라, 부드럽게 먹어보자.”의 제주어

 

낭만보존의 법칙 - 김진숙

 

다 낡아 해진 시간을 내다버리지 못했다

 

기어코 계절을 따라 외출했던 구두 한 켤레

 

오래된 굽을 버리고 저만 혼자 돌아왔다

 

 

신발장 기억의 지층 기댄 날들 많았을까

 

또각또각 가슴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한 줄도 지우지 못하겠다 마지막 귀가처럼

 

 

                                   * 시조 : 계간 제주작가(2020년 겨울호, 통권 71)에서

                                   * 사진 : 차가운 돌과 나무를 안고 겨울을 나는 콩짜개덩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