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모 마스크스
집안만이 물 밖이다
집 밖으로 나선다는 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마스크 없으면 물속으로 갈 수가 없다
가서는 안 된다 마주 오는 마스크와 마주치면
내외를 하거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차 한 잔 마실 수도 없다
남녀는 물론이고 노소도 예외가 없다
마스크가 마스크에게 말을 걸고
마스크와 마스크가 마스크 때문에 언성을 높인다
여분의 마스크가 구원이고 신의 은총이다
집밖은 언제나 깊은 물속이다
마스크가 바람에 펄럭인다
잎 떨어진 가지에 마스크가 나부낀다
빨간 마스크 파란 마스크 노란 마스크 검은 마스크
공항의 감시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스크다
승객은 물론이고 비행기도 마스크를 쓴다
공항의 돌하르방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스크가 바람을 이끌고 낙엽처럼 나뒹군다
공원의 비둘기는 마스크에 발 묶여 허우적거리고
늙은 어부의 그물에는 해파리 대신 마스크가 올라온다
한 해에 6백억 마리의 닭 뼈가 지층을 이루는 지금이다
집안에 들어서야 마스크 벗고 숨비질하는 오늘이다
♧ 발효된 사랑
스물에 시집 왔주
하르방은 나보다 아홉이나 위
밤인지 낮인지도 몰르고 일만 했주 일만
경허멍 다섯을 키와시녜
이제 사는가 허는디 오꼿 하르방이 먼저 가불더라고
나이 먹으난 더 생각 나
낭에 꽃이 피어도 감낭에 감이 열려도 생각 나
아들이여 딸이여 해도 늙어 보난 하르방이 최고
같이 산 세월이 얼마 안 되난
내가 얼른 가사주
하르방이 올 수 어시난, 내가 가사주
우리 하르방
얼굴 곱닥허니까 누게가 업엉 가불지도 몰라
내가 얼른 가사주
근데 난 쭈그리 할망 되어부난
하르방 날 알아봄이나 헐 건가
고만시라, 얼레빗 어디 시니?
□ 시인 노트
여기저기 발품을 팔면서 끄적인 것들을 그러모았다.
그나마 막힘없이 쏘다니던 시간의 기록이다.
그런 날이 다시 오기나 할까?
마스크로 시작해서 마스크로 한 해가 저문다.
마스크를 두고 나와 돌아간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돌아보면 다 내 탓이다.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이 오늘의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할 말이 없다.
가만히 조용히 앉아서 세상 읽는 법을 배워야겠다.
* 김수열 신작 시집 『호모 마스크스』(아시아, 2020)에서
* 사진 : 어제 오후 시내에서 찍은 '백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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