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경희 시 '섬의 비망록' 외 4편

김창집 2021. 2. 7. 13:05

섬의 비망록

 

세화와 월정 사이

이른 조명 하나둘 켜지는 해안도로를 걸어

고무 물질복을 벗지 못한 할망 해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 수확은

어깨 위 망사리를 가득 채운 노을 한 짐

파란색 고무 슬리퍼 걸음만 선명하다

 

이 바다를 잠시 스쳐 가는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보말 몇 개로 하루의 몫을 감당해냈던 애기 해녀가

지느러미 대신 다른 호흡법을

익히며 어른이 되어 가고

거친 물결에도 몸을 내맡겨야 하는

바다의 순리를 깨우친 이후

 

열 길 물속,

소라씨 전복씨 뿌리고 거둬 온

저마다의 물밭이랑에

식솔 대여섯 목숨줄 걸리면

의지할 것은 오직 저 바다뿐이었다는 것

 

마침내 바다와 여자들은 한 몸이 되어

맥박의 주파수까지 같아졌다는 것

 

오늘 저 바다에서 여든두 살 할머니가

물숨을 놓았다는 소식이 또 들려온다

 

숨비소리 한 대목이 사라지는 날이면

바다도 몸이 무너진 채 운다

바람도 잠시 멈춘다

 

당신들은 끝내 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

저 숨비소리들

 

제주 밭담

 

둥글거나 모나거나 차별 없이 쓸모 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숨구멍 나눈,

 

토종 혈통 섬것들,

 

뼈와 지문들

 

꽃무릇

 

꽃을 태운다

 

너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아무리 움켜쥐고 있어도 뜨거워지지 않는

꽃을 태운다

 

돌아가야 할 길

골목 어귀 팽나무 발목에 묶어 두고

 

고작 석 달,

그 후에는 잊겠다는 너에게

밤중에 달려가서 마음을 놓고 왔다고

 

불안한 문자 메시지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날에도

너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스며들고 나면 나눌 수는 없어서

붉은 실로 서로의 팔목을 매듭지었으나

 

호랑지빠귀 울음소리

파동 없이 어둠을 긋고 간 후

저절로 끊어졌다고 했다

 

꽃을 다 태우고 한 계절까지 다 태우고

지나가는 너를 불러 세워

이름을 묻기라도 한다면

너는 부디 외면하길

 

겨울 멀구슬나무

 

일흔에 반쪽 몸을 바람에 실려 보낸 후

햇살 창창한 날에도 궂은 일이 더 많아

스며든 새 울음소리 잠결에도 다독거리며

 

싸락눈 떨어질 때마다 숟가락 움켜쥐며

3년만 더 살고 싶다

병석에서 오롯이 붙잡은 안녕이

때때로 뒷모습을 보일 때마다

 

소중한 것들은 너무 꼭꼭 감춰 둬서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숨겨 둔 곳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당신의 이야기

 

꽃 지고 잎 지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도

맨몸의 가지마다 노랗게 매달고 있는 멀구슬나무 열매처럼

마치 도트처럼

 

기억의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서

비밀스럽게 점이 되거나 선이 돼 버리기도 한다

 

귀덕歸德

 

가만히 떠올리기만 해도

나지막한 슬픔이 되는 이름이 있다

 

당신에게도 말하지 못한

늙은 어머니의 투병기 같은 것

 

절기와 물때를 따라

텅 비는 날이 많았던 마당과

골목을 버린 아이들은

거북등대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스스로 자라는 법을 배웠다

 

사금파리 위에 반짝이는 빛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이라고

수평선 너머가 궁금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자

 

잣담이 내려앉은 밭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풍경들은 조금씩 허물어기도 했지만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몸이 조금 불편할 뿐 정신은 맑은

골목길 팽나무는 갈수록 품이 넓어져서

 

어떤 지명들은 가만히 입술위로 옮기기만 해도

견딜 수 없는 반성이 된다

 

 

                            *홍경희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 202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