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3월호의 시와 얼레지 꽃

김창집 2021. 3. 21. 00:14

고뿔 차 - 정순영

 

어릴 적 겨울놀이 얼음 지치는 신바람에

젖은 바짓가랑이에 고뿔이 들어오면

이마의 열을 짚으시고는

햇봄 뒷산 바위틈에 싹을 틔운 찻잎을 따서

가마솥 뚜껑에 장작불 지펴 덖어서 서늘한 그늘에 말린 작설차를

푹 달인 한 사발에 꿀 큰 숟갈로 휘휘 저어

훌훌 마시고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히도록

아랫목 이불깃을 끌어 덮으시고 잠을 다독이시면

거뜬하게 고뿔을 털던

어머님의 고뿔 차는 사랑의 명약입니다

 

책 무덤 - 마경덕

 

첫 장을 열거나 마지막을 펼치는 손이 있다

애초에 중간은 무시한

 

닫힌 책은 입이 사라지고

그토록 많은 말은 침묵이 된다

 

주소를 달고 누런 봉투에 그대로 갇힌 책

냄비받침이나

기우뚱한 의자 다리에 깔려 죽어가는 책

낱장으로 뜯겨 딱지가 되거나

끝내 고물상으로 가서 폐지가 되는 책

 

한 번도 세상을 만나지 못한 시

그대로 잊히는 소설

 

종이의 뼈가 누렇게 휘어진

고서古書가 되도록 살아남을 수는 없을까

 

작가의 쓰라린 눈물이

밤새 펄펄 끓던 시인의 심장이 식어가는데,

 

갇힌 저 글자들은

언제 무덤을 열고 나오나

 

미친 듯이 책은 쏟아지고 쏟아진다

오늘도 무덤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안부 손수진

 

별다른 용건도 없이

밥 먹었나?

묻고 뚝 끊어 버리는 전화

아버지는 그런 전화를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하셨습니다

밥 먹었냐는 그 한 마디 속에

모든 안부를 꾹꾹 눌러 담아

쥐어박듯 가슴팍에 퍽 안겨 주고 끊어 버리는

장작개비처럼 뭉툭하고 거친 말 속에 스며있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짧은 안부를

이제 들을 수 없겠습니다

 

모래섬 채들

 

왁자지껄 날아와 지낸 날도 한철인가

 

눈 녹아내리자 철새들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가네

 

뒤돌아보지도 않고 끼룩끼룩 날아가네

 

하기야, 뒤돌아볼 줄 알면

철새가 아니지

 

 

뿌리의 힘 - 김완

 

오랜 세월을 이겨낸 뿌리는 거대하다

돌 틈으로 스며들어 돌과 더불어

단단하게 붙어버린 뿌리들 무등산

꼬막재 오르는 길을 수맥처럼 흐르고 있는

어떤 뿌리들은 땅 위로 솟구쳐 나와

숱한 역경의 시간을 무심하게 건너온

그들의 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편백나무 숲 그늘 속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이 인간의 번뇌를 씻어준다

이미 부처가 된 편백나무숲의 나무들이

어리석은 이에게 달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기억이 저장된 목소리는 쉬이

들을 수 없다 수만 개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세월을 기억하는 나무의 눈이다 그들은

한 해 동안 살면서 본 것들을 뿌리에 저장하고

이듬해에 나올 잎들에게 역사를 이어준다

오래된 나무는 천수를 누린 노인의 얼굴이다

그를 버티게 한 것은 뿌리의 힘이었을 거야

 

고문 - 나영애

 

눈보라 속

꽃다발을 품고 온다

현관부터 봄의 미소가 피어난다

향기를 오래 붙들어 볼까

 

잘라온 허리 다시 자르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다 찬물 꽃병에 꽂고

링거 한 방울 위로하여

텔레비전 옆에 놓는다

생의 마지막 몸부림 향을 뿜어낸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자르고 링거 투여

생명을 붙들어 놓을 것이다

꽃들의 왁자한 비명

 

봄을 보고자 했던 성급함이

고문이었구나

오는 봄을 진득하게 기다렸어야 했다

 

 

들리나요 - 여국현

 

밤하늘을 오르는 달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

구름 뒤에서 숨바꼭질하며 재잘대는 별들의 소리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며 소곤대는 바람 소리

가을 나무 머뭇거리며 하나둘 옷 벗는 소리

두물머리 두 강물 수줍은 듯 몸 섞는 소리

깊고 짙은 어둠이 소리 없이 웅얼거리는 자장가 소리

잠든 새들이 꿈속에서 제 짝을 찾아 부르는 노랫소리

천변 갈대들 바람에 온몸 맡기고 춤추며 내는 휘파람 소리

먼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들이 서로를 인도하는 울음소리

어둠과 달과 구름과 별빛에 깃든 영혼들의 낮은 한숨소리

 

들리나요

 

곤히 잠든 그대 꿈속으로 걸어가는

내 영혼의 발자국 소리

 

아이비의 양면 거울 - 정재원

 

넝쿨 잎은 남은 물기와 함께 날아들고 있었다

새로운 지도를 물고 올 때까지

사직서를 마저 써야 할 거 같다

 

어느 건망 속

바람이 불면

넝쿨이 되고 싶어

마스크 끈에 걸린 귀가 무지개 쪽으로 잎사귀를 넓힌다

 

이곳에서는 안전합니다

빛이 정수리 쪽으로 조금씩 어두워지다가

뿌리 깊게 서성이던 가을 머나먼 빛깔로,

뻐근하게 내려앉습니다

 

입질이 나가고 들어오는 이럴 때 귀는

잠 속으로 보호색을 입기도 하는데

뒤척이는 저것들은, 물의 뿌리에서 온 것

 

그녀는, 넝쿨을 기르는 유리병

밖을 넘은 줄기들은 푸른색 양면거울을 들고 있었다

 

한쪽에서 부르튼 물의 발을 쓰다듬을 때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물의 발톱에 찢기고 있었다

 

나의 비극은 당신의 희극보다 영롱합니다

 

또박또박 누군가의 말을,

지문을 열어 놓은 찰나가 허겁지겁 삼킨다

아직도 쓰지 못한 사직서를 들고

 

 

                                     # 월간 우리시03월호(통권 393)에서

                                         # 사진 : 2016년 3월 남해 금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