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앞으로도 - 이성이
나는
앞으로도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다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지금 아기를 포기 하지 않으면
늘 죽음하고 살아야 해요
그래서 나팔관을 묶어버릴 건데
묶을까요?
-나는 혼수상태에서도
손을 내저었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 무서운 힘
며칠 잊고 있었다
냉장고 속 두릅 봉지
분명 야들야들 어린 싹이었는데
화들짝 놀란다
시커멓게 쑤욱 자랐다
만져보니 억세고 거친데
가시들도 날이 선 듯 하다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
두릅의 정신은 오직 하나
살아야 한다 만을 외쳤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따라 외울수록
내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가는데
처음 나무에서 꺾였을 때도
두릅은 그랬을 테지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장점을 마구 찔렀을 것이다
푸른 힘으로 푸른 힘으로
섬뜩하다 억세게 날이 선 줄기
마지막까지 살아내는
삶은 다
죽음을 건넌 발이 있다
♧ 목련이 질 때
양철 쪼가리 녹슬 듯
하나 둘 떨어지고
한 송이에 꽃잎 하나 남았을 때
보아라, 꽃이 저렇게 진다
-허리 구부러진 할아버지 담배를 피우다가 무슨 말엔 듯 활짝 웃는 그 얼굴처럼, 그 얼굴의 뿌리처럼
녹슬어서도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어제의 흰목련
보아라, 진다는 게 저렇다
매달려 누구의 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라도 더 버팅기는
목련
나는 한번 활짝 피었으니
후회하지 않고 죽겠노라고
말할 수 없다
♧ 벚꽃만 보면
중학교 2학년 때
가정 시간에 ‘내 치마 만들기’라는 것을 배운 날이다
집으로 와 겁 없는 실습을 했다
늘 장롱 속에 있던
어머니 꽃무늬 치마
안 입는 옷으로 여기고
내 허리 사이즈로 싹둑 잘랐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재봉틀이 잘 나갈 리가 없다
윗실과 밑실이 엉켜
머리에 붙은 껌처럼 되고
재봉틀마저 서 버렸다
꽃무늬 치마는 몽당치마로 변했고
나는 혼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실직고以實直告 하였는데, 놀란 어머니는 한참을 쳐다보시더니 “몇 년은 더 입을 수 있는 옷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어쩌겠니 이왕 망가진 옷을, 그래도 박음질은 곧잘 했구나.” 하시고
그만이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오그르르 피어나던 몽당치마 위 꽃들
벚꽃은 아니었는데도
한창 분홍이었다
♧ 오래 가는 사랑은
택배 스티로폼 박스를 여니
고추장 항아리와 신문에 둘둘 말려 있는 두릅
머위, 미나리, 볶은 참깨
계피한 들깨가루
그냥 웃음 난다
자식 수대로 손저울로 나누셨을
어머니 굽은 등처럼 순한 저것들
신혼 초에는 바리바리 싸들고 오시다가
사과상자에 담아 고속버스터미널로 보내다가
이제는 택배로
벌써 30년째 변치 않는
어머니식 사랑이다
어머니도 푸성귀가 여기까지 당도하면
시들해진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래도 봄이라고 금방 해 먹이면 된다고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걱정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사소한 것들을 잊지 않는 것이
오래가는 사랑일지 모른다
냉장고에 자리를 만들려고 일어서는데
봄이라 입맛 없을 텐데 입맛 돌게
정서방하고 아이들 해 먹여라
내 눈으로 키운 것이다
어머니 말씀도 싱싱하게 일어선다
*계간 『산림문학』2021년 봄호(통권 41호)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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