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환갑 – 강덕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오일륙에 태어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배웠고
한국적민주주의 궁정동에서 저격될 때
눈물 찔끔 흘릴 줄도 알았다
팔공년 서울의 봄에
집게처럼 오공이 꼽사리 기어
‘탁’ 치니 ‘억’울한 죽음
어디 한둘이었으랴
제깟 게 무슨 나라를 구하겠다고
삼팔륙으로 맞장 뜨다가
직사게 얻어터지기도 하면서
새천년이 오기만 해봐라
살맛나는 시절 오려니 했는데, 웬걸
적폐가 도처에 짱박혀 기생할 때
‘이게 나라냐’며 들었던 촛불
코로나에 자꾸 흔들리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먹고 사는 일에 쫓겼어도
쉽게 타협하지 않았던 것들아!
모질게 굴어서 미안하다
낡아서 쓸모없기 전에 차라리
닳아서 사라지겠네 다짐한다
참, 설레고 벅차다
♧ 상사화 - 김경훈
그대는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으나
사랑인 듯
아닌 듯
속이 타지만
부디
살아만 있으오
제발
그대의 부재는
또한
나의 상실이니
♧ 침묵 – 김병택
‘그대’가 ‘나’에게
남긴 것은 침묵이었다
나득한 히아신스 향기가
천천히 지나갈 때도
세속의 잡다한 시선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그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물론 다가오지도 않았다
흐르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더욱 더
‘그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막 떠났을 때*에는
눈물의 양이 초마다 달랐다
바로 옆에, 화면 가득히
깊게 오열하는 ‘그대’의
침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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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사아마(프랑스)가 감독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의 마지막 장면.
♧ 갈치국 - 김수열
돗거름 내는 날이면 어머니는 으레 갈치국을 끓였다
책 보는 사람 찾아가 택일을 하고
동네 남정네들이 와서 수눌어 돗거름 내는 날이면
토막 낸 갈치에 늙은 호박 투박투박 썰어
새벽 조반부터 갈치국을 끓였다
동네 삼춘들이 갈중이 차림으로 집에 오면
아버지와 삼방에 둘러앉아 갈치국을 먹었다
담요로 정성껏 싸맨 항에서 오메기술 꺼내고
국사발마다 두툼한 갈치 한 토막이 들어간
갈치국을 먹는 동안
“아이덜은 궤기 안 먹는 거여”
어린 우리는 반지기 낭푼밥 앞에 놓고
정지에 멜싹 앉아 어머니와 갈치국을 먹었다
갈치 없는 갈치국을 먹었다
우리도 얼른 커서 통시에 돗거름을 내고 싶었다
삼방에 앉아 오메기술에 갈치국을 먹고 싶었다
두툼한 갈치가 들어간 갈치국을 먹고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 두잎약난초 – 김순남
-여성이 웃는 세상
한때는 누군가의
애잔한 누이였습니까
한때는 누군가의
살뜰한 딸이었습니까
아, 누군가의 소중한
가장이었습니까
아아! 누군가의
갸륵한 사랑이었습니까
그 가장의 따스한 눈물이
그 갸륵한 사랑의 뭉클함으로
한라산 숲길이 깊어지는 것입니까
* 『제주작가』2021년 봄호에서
* 사진 : 반디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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