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정友情 - 이인평
-설봉雪峯*을 떠나보내며
가난했던 시절
말은 하지 않았어도 서로
잊지 말자고
먼 훗날 지금 여기에 와서도
한 몸처럼 한 생각으로
의리를 지켜왔지
세월 따라 점점 늙어가면서도
순수하고 순박했던
동심을 지니고 언제나 그리웠던
친구야
살면서 아프지 말자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다독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
사랑보다 깊은 믿음으로
삶을 위로했지
지치고 힘들고 외로워도
아프고 화나고 고통스러워도
웃으면서 잘 참아 견뎌내자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말을 해줄까
더 깊은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줄까 하면서
서로를 위해 간절했던
우정
친구야, 네가 떠나고 비 내릴 때
나는 오히려 행복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꿈꾸고 노력하고
안간힘을 다해 추구하고 얻었던
그 무엇으로도
서로를 위해 주었던 우리의 우정이 지닌
아름다운 가치를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래, 우리의 우정만으로도
이미 천금보다 소중한
행복을 살았으니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이런 사랑, 이런 보람 누리자고
기쁘게 외쳐도 되는,
친구야, 잘 가라고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면서도
슬프지 않구나, 아쉽지 않구나
그토록 천진난만했던
네 모습, 네 표정이 눈앞에 선해도
그럴수록 너를 만나 행복했던 추억들이
내 마음에서 봄꽃처럼 피어나서
언젠가는 너를 다시 만나
천상에서도 시를 쓰고 노래 부르는,
우리의 영상이 눈물에 어려 오히려 기쁘구나
친구야! 잘 가,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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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雪峯 : 2021년 2월 25일 소천한 장영철 화백, 국악인의 아호.
♧ 환승 – 이규홍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가는 길
단말기에 카드를 대자
환승이라는 말이 따라 나온다
그래, 내 삶의 반환점
참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아버지 어머니도 먼 길 가실 때
마을 외딴 곳집에 들러
꽃상여를 타고 떠나셨지
바람처럼 휑하니 사라지는
순간의 소멸이 아니라
느릿느릿한 속도로 걸어가는
꽃상여를 택하셨지
종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 버스는
상여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돌고 돌아가는
환승버스 안에서 잠시
내게 남은 생을 꺼내어 본다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If you leave me now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찬바람 부는 이른 새벽
숲속에 시카고가 부르는 노래 ‘If you leave me now’의 선율이 붉게 스며든다
느티나무 아래 나무벤치의 한 남자가 창백한 얼굴의 한 여자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말없이 옷깃을 여미고 있다
그는 애원하며 그녀에게 말한다
그대가 나를 두고 지금 떠나면 그대는 나의 가장 큰 부분을 가지고 가는 거예요
그대여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요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말한다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네요
언제 우리 다시 만나요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며 목메어 말한다
그대여 떠나지 말아요
그대와 함께 한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끝낼 수 있나요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
저기 숲속 나무벤치의 한 남자가 찬바람에 바삭거리는 낙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 꽃 속에 꽃 – 한인철
그냥 바라볼 땐 몰랐어요
꽃이면 꽃인가 보다
그랬어요
그러다 어느 한 날
향기로움에 가까이 다가가
꽃송이를 들여다보았어요
겉으론 한 송인데
속으로 품은 만 송이가
나팔대고 나에게 품었어요
꽃도 가까이하니
나에게 꽃동산을 내밀 듯이
님의 향기 고마워요.
♧ 섬진강 - 임미리
좀처럼 오지 않는 봄을 찾아 섬진강에 간다.
지난여름 집중호우로 상흔이 가시지 않는
에움길 마디마디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도 버들강아지 힘겨운 듯 실눈을 떴다.
섬진강 줄기 따라 걷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서글픈 시대, 마스크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은근한 향기
출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매화꽃망울
서툰 몸짓으로 꽃망울을 한껏 부풀리고 있다.
불확실한 이 시대에 상처 받은 영혼
위로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피어나는 것들
끝없이 이어지는 강물 사이사이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반쯤 몸을 눕힌 바위들
지나간 물결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 결 그대로 간직한 채 반짝이는 모래사장
섬진강은 변함없이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을 품고 있다.
행인의 무심한 눈길도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놓치지 않고 고이 간직하겠다는 듯이 그 안에 무수한 것들을 새겨 넣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상흔을 간직한 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봄은 또 그렇게 온다고 강물이 노래한다.
섬진강 줄기 따라 머무는 발걸음 더없이 가벼워진다.
* 월간 『우리詩』 2021년 4월호(통권394호)에서
* 사진 : 남해 다랭이길(2016. 3. 2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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