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3일, 저물 무렵
저물 무렵은 누군가에게서 묻어오는 감정의 흔적들이다.
높은 담 이마 너머로 하나둘 형광등 켜진다.
이제 막 화살나무의 작은 싹들이 돋아 오르고
아기 손톱만 한 연둣빛 감잎들
그 곁에 세 그루 적단풍의 연한 잎들이
내 뺨을 스치는 바람에 소리 없이 흔들린다.
낮은 담 너머 아가의 여린 손금 조심스럽게 펴지듯
잎맥 펼치는 무화과나무, 장손의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다.
자잘자잘 꽃잎 매달린 마을 어귀 팽나무에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무렵이다.
일흔 해 전 그날도 이랬겠다.
각지불 하나둘 낮고 성근 돌담 너머로 번지며 켜졌겠다.
이제 막 화살나무 작은 싹들이 돋고
아기 손톱만 한 연둣빛 감잎들
그 곁에 적단풍 몇 그루의 연한 잎들이
보릿고개 넘기는 수척한 누이의 봄 뺨을 스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겠다.
바람의 길 너그럽게 풀어놓은 낮은 담 너머 무화과나무,
아기 손에 난 여린 손금 조심스럽게 펴지듯
잎맥 펴고 있었겠다.
캄캄한 밤, 불로 일렁이며 붉던 오름들도
저녁노을 아래 낮 동안의 고단한 표정 가라앉히며
침묵의 밤으로 깊어가고 있었겠다.
마을 어귀의 팽나무 자잘자잘 꽃잎 매달려 있었겠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날이었겠다.
성근 그늘에 꽃 핀 봄날 저물 무렵이었겠다.
간절함 없이 따라온 내 길 뒤돌아본다.
비어 있다.
먼 길 걸어온 얼굴들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듯
먼 길 걸어온 나무들의 길 뒤돌아보면 눈물이 스며 난다.
쭈그려 앉은 나무들 눈이 시리게 바라보고 있으면 새잎처럼 눈물이 돋는다.
그날도 백목련 개나리, 앵두꽃 벌써 진 봄이었겠다.
산 목련 피려면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하는 날이었겠다.
마을 가까운 머흘왓* 밭담 위
으름과 멍 덩굴에 성급한 꽃들 한창이었겠다.
오랜 밤 거쳐 온 길 다 옷 벗는 봄빛 새잎들 앞에서
꽃잎들 앞에서
내 말들이 저녁 물빛처럼 침묵한다.
저물 무렵의 나무들,
누구도 심문하지 않는 침묵의 밤으로 깊어가고 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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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돌 따위가 박아지고 자갈이 많이 섞인 밭.
♧ 오름에 새겨 넣은 문장
내가 아버지의 아버지이고 나무와, 나무의 나무였다면 애초 내 맘은 불이었겠다. 귀향길 오른
화롯불이었겠다. 그러니 어머니, 아버지. 봄에 꼭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 봄 짧은 줄 알았다.
여름이면 끝난 줄 알았는데 발밑에 꽃이 지고 또 겨울인데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다. 가을 가고
또 빈 가을이다. 벌써 허연 서리 내린 지 일흔 해, 계절은 순서 없이 오고 또 미쳐서 가고 있다
오름 사이에 갇힌 바람, 태어나기도 전에 잃어버린 내 울음을 닮았다. 저 바람의 공명으로 나는 천천히 묽어져 간다. 오름과 오름 사이를 흐르는 숨결들, 그 숨결과 내 몸의 공명이 내 마음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훅 불면 나가떨어질 미열 같은 날이었다.
“이것이 중심이다”에 가닿는 순간 모든 게 사라지는 나는, 애초 ‘그립다’라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오랠 수가 없다. 얼마나 더 오래도록 건너야 이 ‘그립다’는 말 한마디 다 건널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앓는다.
왜 이리 처음 가보는 골목과 사거리가 많은 것인가, 오늘도 처음 가보는 낯선 골목과 네거리에서 서성거리는 밤, “마음보다 몸이 더 먹먹하다”라는 문장을 오름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한다.
낡은 전화기 속에서 “아빠, 왜 집에 빨리 안와?” 하고 일곱 살 아들이 내 귀문을 열어젖힌다.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간다’라는 말이 너무 오래되어 무슨 의미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이다. ‘돌아간다’라는 말은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는 말, 아직 더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는 말, 내가 떠나지 않는 오름은, 내내 말이 없다.
그립다는 표정이다.
기러기 돌아오는 한로도 어느새 지나가고 벌써 상강이다. 누군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송령이골*에 다시 첫눈이 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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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
*정찬일 시집『연애의 뒤편』(문학수첩, 2020)에서
*사진 : 적단풍, 별도봉 곤을동 쪽, 송령이골 '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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