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시揷匙
제주섬 바람소리엔 뼈 맞추는 소리가 난다 일어나 아우성치는 이백육 마디마디 사월의 제단 앞에선 산목숨이 죄만 같아
애비 아들 보내는 날 가슴 치며 울던 바다 육십 년 만에 찾아온 육신 젓갈 삭듯 녹아내려 생살점 떼어내듯이 봄꽃 벌써 지려 하네
머리 하나에 팔다리 맞춰는 놓았다만 내 남편 내 아들 맞기는 한 것이냐 어디다 하소를 할까 혼절했던 시간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절뚝이는 저승길 열두 대문 훠이훠이 고이 넘어 가시라
어머니, 고운 멧밥에
떨며 꽂는
숟가락
♧ 꽃 피지 않는 봄
애비 있는 산으로 뛰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죽어라 달렸어요 나도 이제 다섯 살인 걸 서천꽃밭 흐드러진 환생의 꽃무더기 열린 동공 안으로 와락 안기고 날개가 돋으려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요 둥실 떠오르는 몸 아, 날개 생겼나 봐요 코끝에 확 스치는 풀냄새 아버지 냄새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 탕, 탕, 타타탕!… 아버지 등에서 흙냄새가 나네요 언제나 잉크냄새 났던 아버지 고개 들어 하늘 한 번 봤어요 잉크빛 하늘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아요 나, 잘 뛰었나요? 이제 아버지 만났나요? 졸려요, 아버지 얼굴이 안 보여요 등 돌려 나를 봐요 아, 졸려…
희망의 숟가락 하나
떨어뜨린 어느 봄
♧ 섯알오름
감지되던 예감 앞에
더듬이 세운 새벽빛
호명되는 그 이름이 싸늘하게 감겨온다 그 누구 이름일까 휘둘러 살피는데 삽시간 꽂히는 눈빛 등 떠밀며 꽂히는 눈빛 세워 앉은 무릎 풀며 휘청 나설 때 아, 달빛 눈빛 푸른 저 새벽달 최후의 증인처럼 졸졸 따라 나선다 트럭에서 멀어지는 한림항 갯내음 신사동산 소롯길 지그재그 해무리 그 속으로 그리운 가족사 드문드문 지나고 죽음의 예고편처럼 길이 마냥 끌려온다 기막힌 사연들이 타전하듯 속삭일 때 귓속말 뚝 끊기고 길도 이젠 끊기고
지상의 마지막 인사
흘려놓은
신발
한
짝
♧ 어떤 이별
시퍼런 초사흘 달 쪽창에 걸려있다
생의 마지막 날 빈 젖 빠는 어린 것 어둔 밤 호명소리에 파르르 감전 된다 명줄 고작 백 일이냐 불쌍한 내 아가 어미 살점 떼어주랴 어미 피를 짜서 주랴 떠나는 마지막 길에 눈 온다, 함박눈. 아가야 눈을 떠봐라 산지항에 눈 내린다 꽃상여 아니면 어때 처음 타보는 배로구나 널 그냥 풀섶에라도 두고 올 걸 그랬어 배 밑창에 짐짝처럼 포개앉은 사람들 저승으로 가는 길 오장육부 비워내듯 서러운 오물덩어리 굽이굽이 열두 구비 저승인 듯 이승인 듯 서글픈 뱃고동 네 아비 우릴 찾아 여기까지 찾아온 듯 산지항 뱃고동 네 아비 우릴 찾아 여기까지 찾아온 듯 산지항 뱃고동 소릴 여기서 듣는구나 곰삭은 사투리로 비릿비릿 내리는 눈, 아가야 저승이 아니란다 눈을 떠봐라 아가야! 아, 가, 야! 아가야~! 슬픔의 정점에선 눈물 나지 않았네 홑포대기 덜렁 두른 어린 것 하나를 눈 녹아 질퍽거리는 목포항에 묻었다 봄 여름 가을 가고 눈 내리면
살처분 짐승새끼가 자꾸 나를 부른다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등대가 보이는 별도봉 둘레길
비석도 산담도 없는 나즈막한 무덤 하나, 바다가 그리웠을까 그 너머가 그리웠을까 마지막 의식 치르듯 관 벗어 섬에 들었을, 무연고 세상에 빛 하나 들지 않았을, 기막힌 생애 하나가 울먹이다 누웠을… 영영 오지 않을 기별일 줄 모르고 선 자리가 누운 자리 될 줄을 모르고
나 여기, 있는 줄 아오 입만 벙긋 거린다
*김영란 시조집 『몸 파는 여자』(우리시대 현대시조선 133, 고요아침, 2019)에서
* 사진 : 일찍 핀 쪽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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